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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Sep 17. 2023

워크맨의 시절

에세이


사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산 마이마이(MyMy) 카세트는 2류였다. 그럭저럭 있으면 사용하긴 하는데, 어디다 대놓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물품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는 한국제품은 일본제품보다 두 수 아래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보다 더 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제품에 대한 이미지는 고급스러웠다.

80년대 일본은 세계최대채권국이었고 미국마저 삼켜버릴지도 모른다고 예상이 있었다. 90년대 초반 일본경제가 주춤하기 시작했을 때도 여전히 일본의 힘은 영원할 것 같았다. 일본대중문화 역시 규모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우리와는 비교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문화를 수입하기를 꺼렸다. X-재팬에 열광하고 수많은 재패니메이션이 음지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일본문화 마니아 집단도 있었다고 하는데,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으로만 떠돌았다. 어쨌든 많은 이들이 시장을 개방하기만 하면 일본의 전자제품과 문화상품이 한국시장을 점령할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자연히 마이마이가 차지하지 못한 왕좌를 두고 소니, 아이와라는 ‘2강’과 파나소닉이라는 ‘1중’이 경쟁하던 형세였다. 소니의 히트상품인 ‘워크맨’이라는 브랜드가 보통명사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랬다. 모든 카세트는 워크맨이라고 불렸다. 마이마이는 그냥 마이마이였다. “마이 볼”, “마이 볼” 할 때 쓰이거나, 촌스러운 마이 패션의 ‘마이(jacket)’로 어울릴 만한 ‘마이마이’였다.


위 어학용 카세트와 흡사함.


그럼에도 ‘탱크’보다는 나았다. 천원백화점에서 팔던 만 원짜리 워크맨(?)이었는데, 중국제로 워크맨을 잃어버렸거나 선생님에게 빼앗겼을 때 싼 맛에 사서 임시로 사용하던 제품이었다. 모두가 부담 없어서 다른 친구에게 전해줄 때 던져서 줄 수 있는 제품이었다. 이를테면 “마이 탱크”, “마이 탱크” 외칠 수 있었다. 실수로 떨어뜨려도 부담 없고, 고장도 나지 않아 그 단순하고 튼튼하며 경제적인 제품을 모두가 사랑하면서도 은근히 무시했다. 그러면 저 스스로 눈치 채고는 기력을 다해버리는 제품이었다. 마이마이가 약간 부담스러우면서 고장도 은근히 잘 나던 것에 비한다면 탱크는 ‘국민워크맨(?)’이었던 셈이다. (탱크는 2000년대 초반 자주 쓰이던 휴대용 어학용 카세트와 흡사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학 공부가 더 잘 됐다는 건 아니다.)


반면 일제 워크맨들을 그렇게 다룰 수는 없었다. 우선 비쌌고 AS를 받으려면 불편했다. 디자인도 예뻐서 흠집이 가는 것을 달가워하는 주인은 없었다. 누군가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신형 워크맨을 가져오는 날이면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들은 한번쯤 만지작거리며 기능을 확인했다. 우리 때는 선곡기능이 있는 워크맨이 나와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오토리버스(앞면이 끝나면 자동으로 뒷면으로 넘어가는) 기능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는 마이마이 사용자들도 그 기능을 자부했다. 하지만 선곡 기능은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몇 곡씩 선택할 수 있는가에 따라 우월함이 결정되었는데, 마이마이는 그 부분에서는 뒤처졌다.

그래도 탱크보다는 나았다. 탱크에서 선곡 기능을 바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저렴한 탱크를 살 때 감히 오토리버스를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렇듯 탱크에는 오토리버스가 없었기에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었다. 말하자면 탱크에 테이프를 넣고 잠들려 하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깊이 잠들면 모르겠으나, 책을 가지런히 정돈해놓고 그 위에 한쪽 얼굴을 고정하고 낮잠에 빠져들 때는 대개 문제가 생겼다. 침을 흘리지 않기 위해 꿀꺽, 한 모금의 침을 삼킨 뒤 행복하게 꿈나라로 가려는 찰나,

철컥!


소리에 놀라 깨고 만다. 테이프는 뒤로 넘어가지 않았고, 탱크는 요란하게 재생버튼을 밀어내면서 고함을 친 것이다.


철컥! 철컥! 철컥!


탱크의 태생적 한계였다. 철컥. 그러면 대개 울컥, 한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테이프를 뒷면으로 돌려 넣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음악을 듣는 모두가 평등한 순간이 있었다. 당시 아침 7시 40분까지 등교해서 밤 11~12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가는 반복된 생활 속에서 워크맨의 건전지는 매우 중요했다. 미처 여분을 챙기지 않으면, 가게에서 사오는 것도 번거롭고, 충전건전지는 늘 수명이 짧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족한 건전지로 테이프 되감기 같은 것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선곡기능마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 대신 우리 거의 모두가 되감기를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했다.



첫째, 카세트테이프를 꺼낸다.



둘째, 테이프의 한쪽 ‘콧구멍’에 모나미 볼펜을 끼운다.



플러스펜이면 더 좋았다.

셋째, 한쪽으로 일정한 힘을 주어 돌린다. 그러면 펜을 축으로 삼아 테이프가 돈다.



만일 힘이 일정하지 않으면 테이프가 안에서 엉켜 망가지거나 테이프가 늘어날 염려가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테이프 감기를 수동으로 했다. 그때만큼은 평등했고, 모두가 신기능을 원했으면서도 그때만큼은 가장 구식의 방법을 택했다.

능숙한 학생들은 왼손으로 테이프를 돌리면서 오른손으로 문제를 풀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랐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니 실로 대단한 경지였다. 그러다가 가끔 실수할 때가 있다. 원숭이도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데 사람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었다. 그렇게 테이프는 순식간에 펜을 빠져나와 표창처럼 날아간다.



그리고 공부에 열중해 있는 한 학생의 뒤통수를 때리고 만다! 오 마이 갓. 본의 아니게 표창 던지는 ‘돌아온 일지매’ 된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채 씩 한 번 웃고, “미안”이라고 사과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테이프를 주워올 것이다. 사실 녀석의 뒤통수보다는 테이프가 부서지지 않았을까 그게 더 걱정이다.

가해자의 대처 자세를 보고는 피해자의 표정이 일그러졌을 수도 있겠다. 짜증이 황당함으로, 이내 분노로 바뀌는 표정이 순간마다 다채로울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테이프는 그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걸로 족했다. 대신 피해 학생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가해 학생이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한 번 미안하다며 멋쩍게 웃고 나야 사건은 해결된다.

적은 용돈을 아껴가며 음반을 사서 듣던 당시, 우리에게 재생기와 음반은 가장 중요한 필수품이었다. 특히 ‘소니’나 ‘아이와’ 워크맨을 갖고 싶어 했다.

내 경우엔 대문자 AIWA에서 소문자 aiwa로 넘어가던 시대에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그래서 미처 아이와의 전설적인 제품을 써보지 못했다. 당시 나는 아이와의 사운드를 선호했고, 특히 사운드를 네 단계로 나누는 기능이 있던 아이와 제품을 좋아했다.

그런데 아이와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는지 단계적으로 소니에 합병되고 만다. 2002년에 소니로 인수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아이와는 제품 정책에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아이와의 상표가 대문자 AIWA에서 소문자 aiwa로 바뀐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내가 바라던 그 제품이 단종된 것이다! 사운드에 대한 정책이 소니의 방식을 따르는 것으로 정해졌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와의 강점이었던 사운드의 다양성이 훼손되었고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행히 록 마니아 친구를 꼬드겨 그 제품과 내 워크맨을 바꾸었다. 그 덕분에 내가 원하던 그 기종을 사용해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남은 역사적인 두 제품은 처음 샀던 소니 워크맨과 친구와 바꾸었던 아이와 제품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변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 시기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렇게 고등학생 시절이 지났다. ‘아이’와 워크맨은 20대를 지나면서 잊혀야 했다. 나는 분명 ‘어른’을 준비해야 했다. 30대 후반에 이른 지금 돌이켜봐도 아이와 멀어져가던 20대의 많은 순간이 떠오른다.

그 사이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아이리버와 코원이 들고 나온 MP3플레이어가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데다 휴대폰 역시 한국제품이 우수해지면서 사람들은 일본제품을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재생을 하게 되면서, MP3플레이어마저 사양화되었으니, 워크맨은 말할 것도 없다. CD조차 예전같지 않은데 카세트테이프가 제대로 살아남았을 리 없다. 2000년대 이후 음악 산업 분야에선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문화에 잠식당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개방 후에도 폭풍 같은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류 열풍으로 아시아에서 대한민국의 K-Pop과 전자제품들이 강세다. 그러다 보니 오래전 일본 워크맨 기술을 동경하던 것과는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떠오르는 삼성, 지는 소니’라는 말도 있으니.


그 사이 나는 이어폰에서 헤드폰으로 바꾸었고 이제는 그냥 이어폰이든 헤드폰이든 딱히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만큼 열성적으로 음악을 듣지는 않는다. 많이 듣지 않으므로 귀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 20대 중반 때부터 차츰 음악을 향한 열정은 식고 있었다.

그동안 두 번 심하게 중이염을 앓았고, 의사는 내가 40대에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겁주었다. 나는 ‘무늬만 베토벤’인 나를 상상해보았고 그건 싫었다. 그래서 헤드폰을 벗었다. 청각이 예민해질 즈음이라 자칫 오디오 ‘마니아질’을 할 뻔했는데, 귀 때문에 그러기 어려웠다. 오디오로 들을 시간보다 이어폰으로 들어야 할 시간이 훨씬 많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재생기를 휴대하지 않으면서 온종일 음악을 듣던 청취습관이 사라졌다. 음악 감상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다. 자연히 오디오에 대한 욕구도 함께 줄어들었다. 밤새도록 라디오의 주파수를 돌려가며 음악을 듣고 사고 싶은 음반을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어 놓았지만, 그 많은 음반 중 대다수를 아직 사서 들어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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