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목차: 나는 무엇을 쓰고 있나]
◑ 저술 목록의 흐름
♬ 발화점: 맹아기
♬ 이론편
♬ 실천편
♬ 침체기
♬ 에필로그: 지향점
♬ 후일담
[소개글]
- 놀이글의 스타일을 적용한 저술 자기소개서입니다.
- 그림은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저 역시 시민지성이란 게 현실에 다소 먼, 이상적 발상이라 여겼어요. 그래서 현실적인 접근도 필요했어요. 원론적인 관점을 벗어나 다양한 개성의 시도로도 의미 있다고 본 것이죠.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 없어도, 적어도 나의 최적화된 글쓰기 형식을 찾아가는 여정은 될 수 있다는 식으로도요. 조금 물러서서 생각한 거죠."
- "저는 글쓰기 유형에 따른 작은 정체성을 다섯 가지로 보았다고 했죠. 시민지성의 정체성이기도 한데, 시민기자, 시민예술가, 기록비평가, 지식놀이꾼, 지식게릴라가 그것이죠. 여기서 시민적 요소를 빼면 기자, 예술가, 형식주의적 비평가, 학자가 있을 거예요."
♬ 실천편
이론편에서 원론적으로 방향성을 설정하고 이에 따른 논리를 전개했지만, 아직 ‘시민지성’이라는 존재나 현상이라고 해봤자, 오히려 많은 한계를 지닌 것처럼 보였어요. 좋은 쪽에 대하여 집단지성의 논의도 있었지만, 그만큼이나 정치적 팬덤, 악플러들의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이 더 도드라져 보였죠. 집단지성을 말하는 시대지만, 차별을 옹호하는 극우의 득세와 교주의 인기 등 반지성적 면모는 온라인을 타고 널리 퍼졌고요. 미국에서도요.
“그래도 계몽주의 시대보단 시민의 수준이 지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믿었죠.”
저 역시 시민지성이란 게 현실에 다소 먼, 이상적 발상이라 여겼어요. 그래서 현실적인 접근도 필요했어요. 원론적인 관점을 벗어나 다양한 개성의 시도로도 의미 있다고 본 것이죠.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 없어도, 적어도 나의 최적화된 글쓰기 형식을 찾아가는 여정은 될 수 있다는 식으로도요. 조금 물러서서 생각한 거죠.
나 스스로 시민지성이란 입장, 시민이 지성적으로 성장하려는 노력 가운데 있을 때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 배우고 싶었어요. 또 직관적으로 알아보기 쉬운 압축적인 예시를 들 수 있다면 좋겠다 여겼어요. 글쓰기 형식이요.
어떤 가죽을 입어야 할까 고민했죠.
이론편에서 이미, 나만의 개성으로 삼을 만한 지점을 찾기 위해 글쓰기의 유형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죠. 그렇게 시민지성의 글쓰기 유형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섯 가지 작은 정체성이 드러나더군요. 사실 시민지성의 글쓰기 정체성을 발명한 것으로 보던데, 그게 아니라 원래 있던 유형을 발견하여 호명한 거죠.
여기서 약간씩 핵심을 비껴 맞게 하면서 전문가들의 정체성을 명명해보기도 했죠. ‘비껴맞는다’라 하면, 사실 시민지성의 글쓰기 유형의 대부분이 전문가들에게도 통한다는 의미, 그런 의미로 보편적인 글쓰기 유형이라고 불러야 할 거예요.
여기서 관점에 따라 방점만 조금씩 비껴 찍었다는 의미죠.
[나, 희원이]
“방점을 꽃에 찍었나요, 머리에 찍었나요? 그냥 다 싫은가요? (웃음)”
저는 글쓰기 유형에 따른 작은 정체성을 다섯 가지로 보았다고 했죠. 시민지성의 정체성이기도 한데, 시민기자, 시민예술가, 기록비평가, 지식놀이꾼, 지식게릴라가 그것이죠. 여기서 시민적 요소를 빼면 기자, 예술가, 형식주의적 비평가, 학자가 있을 거예요.
“오늘은 프로페셔널한 옷을 입을까, 시민지성의 옷을 입을까.”
지식놀이꾼의 경우엔, 전문가 중에선 활성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거든요. 지식으로 과감하게 돌파하며 놀이적인 요소로 의견을 개진하는 건데, 니체가 <차라투스투라를 이렇게 말했다>와 같이 과감하게 서술한 것을 두고 지식놀이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는 있어요. 또 <호모 루덴스>에서 공격적 개진을 하겠다는 서문에도 기존 학계의 기풍과는 어긋나는 과감한 요소가 보이고요.
또 문제집에서 문제를 맞히는 방식의 편집을 염두에 둘 만한데, 이 역시 기자적인 교양 저술에 속해도 무방하죠. 재미 있는 만화적 해석 역시 그렇고요. 만화 교양서 이런 것처럼요. 모큐멘터리 정도가 지식놀이적 요소가 극대화된 채로 전문가의 장르로 자리잡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 역시 세는 약하지만요.
그런 면에서 조금 더 과감하게 지식놀이적 요소를 극대화해서 그 정체성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만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시민적 글쓰기의 입장에서는요.
예술처럼 특별한 면허 없이도 다양한 소재에 접근 가능한 분야에서 ‘기존 분야 너머의 아웃사이더나 비주류 예술가, 또는 아마추어 애호가의 관점에서’ 시민예술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도 있겠죠.
또 그만큼이나 지식의 놀이적 요소를 극대화해서 가상다큐의 방식이라든지, 몽상적 개진을 통하여 소설적 내용을 교양적이거나 사상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다고 봤죠.
이러려면 내적인 치밀함이 중요하겠죠. 다른 지점에서 공격적이라면 내적 논리는 아주 견고해야 의미 있는 사색적 몽상이 될 거라는 의미죠.
조금 더 과감한 얘기를 할 수도 있지만, 정말 무의미한 정보를 양산할 수도 있으니, 이런 시도를 하려면 ‘특히나 정말’ 창의적인 면모가 돋보여야 할 거예요. 굉장히 무모한 탐험을 시도하거나요. 학계에서도 알지만 조심스러워 하는 지점, 예를 들어 다중우주에 대한 학술적 발언을 조금은 유희적인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한다든지요. 소설을 쓰듯 전제를 깔고 몽상적 사유를 하는 셈이죠. 진짜인 것처럼 음모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요.
“그러다 음모론만 횡행한다고 봐요. 지금 난 냉소적 회의주의자라고.”
그러한 논쟁적인 부분에서 도발적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정체성으로는 지식게릴라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지식놀이만의 어떤 미덕이 있어야겠죠. 그에 관해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 같아요. 약 15년쯤 되었네요.
어쨌든 시민이 전문성을 지니지 않은 상태로, 재야의 학자처럼 지식을 주장하려면, 그게 무엇이든, 정말 의미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할 거예요. 그건 글쓰기를 진지하게 하려는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겠지요. 자기만족을 위해서 글쓰기를 하는 게 아니라면요.
“환단고기 싫어요. 큐아넌 싫어요. 일루미나티 이야기 싫어요. 어렸을 적 이야기로는 재미 있지만요. 진실처럼 주장하면 안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