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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Oct 18. 2023

모래의 여자

콩트


 그때 눈에 띄었던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도 그렇다. 먼지가 묻은 채 언제 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의 종이는 다소 누랬고, 책장의 아래 구석에 박혀있었다. 직접 사포질을 하고 니스 칠을 했었던 간이 책장의 면을 이미 거칠어진 손으로 매만지다가, ‘모래의 여자’가 손에 닿았다. 가지런히 놓인 채 주인을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딘 모양이 좀 안쓰럽게 느껴졌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나는 책장에서 묻어나는 먼지를 보며 그 책에서 가슴에 남은 문구를 떠올렸다. 또한 그 문구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와 청소하던 순간이 기억났다. 청소를 얼마나 오랫동안 안 했는지 먼지가 뽀얗다며 나를 타박하던 그녀- 를, 새삼 기억해야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낮잠을 자다가 어렴풋이 깨어나던 느낌이 생생히 떠오른다.

 잠에서 깨어날 때 아련하게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는 소리. 집 옆의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자주 축구를 하며 소리치는데, 그들의 소리는 낮잠에서 깨어나는 내게 하나의 리듬이 되어준다. 자장가 같다고나 할까. 또한 부드러운 자명종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잠을 반 정도 깬 상태로 그 소리를 듣곤 했는데, 그렇게 있다가 눈을 뜰 때면 주변이 뿌옇게 보였다. 대개 오후시간이었다. 유리창에 부딪혀 부서지는 빛이 여러 갈래로 뿌려졌고, 그 빛 하나하나의 갈래를 따라 다양한 기억들과 기억들에 물려나오는 여러 감정이 조용히 내 몸에 퍼졌다. 감정들은 내 의식 속으로 급격히 빨려들어 이내 사라진다. 모래처럼 흩어지는 기억들이 한밤의 모래폭풍처럼 불어와 나의 ‘지형도’를 바꾸고, 모래와 풍화된 바위가 아무도 모르게 몸 섞는다.

 그녀와 함께 만든 책장과 함께 모았던 책들을 매만지고 있다. 이제는 그 멋쩍은 추억을 되짚고 있다. 그녀는 그저, 내게 ‘모래의 여자’로만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피어오르는 태양과 희부옇게 퍼지는 구름, 너의 연기와 바람. 바람과 모래, 모래- 여자, 여자, 너의 체취, 그림자와 기억들. 기억들이 펼쳐지는 낡은 책장과 책장 안 책들에 끼여 있는 모래의 여자와 여자의 가슴 속에 숨겨놓은 너의 문구와 사람의 형체를 만들었다가 사라져버리는 문구 속의 너.

 예전에는 책장을 보고 만지고, 예전보다 예전의 일을 떠올리고 감정을 느끼고, 느끼다가 지치고 잠들고 꿈꾸고, 꿈에서- 책장을 보고 만지다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가 책장에 숨어 있었다는 걸 발견하고, (그녀는 힘들다고 외치고 웃고 칭얼대고,) 갑자기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가 상상 속의 여자인지 실제 모델이 있는지 궁금해지고, 어느 쪽이든 진실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아베 코보의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라는 문장이 떠오르고, 그 문장 속에 나의 기억이 스며들고, 이것이 나의 기억인지 아베 코보의 기억인지 아니면 내 꿈속에 등장한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의 기억인지 헷갈리지는 않고, 헷갈리지도 않는 그 명료한 기억이 싫고,


 때론 기억이 집착으로 자라난다. 예컨대-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대한 왕릉에서 사뿐히 뛰어올라 평지에 선 모래의 여자를 보았다. 그녀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 했고, 살짝이라도, 닿기 전에, 바람에 흩날려 그녀의 모래들은 하나하나 공중으로 흩어져갔다. 그녀가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도 혹시나 내 손이 닿아 더 빨리 사라질까 두려워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다.





- 2006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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