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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Oct 28. 2023

오직 예수뿐이네

콩트

  토요일 새벽에 차를 몰고 교회를 가는 건 솔직히 좀 귀찮은 일이다. 그럼에도 가야 한다고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귀찮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도 있다. 살다 보면. 

  남자는 차에서 요즘 유튜브에서 듣곤 하던 CCM을 흥얼거렸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이런 가사가 있었는데 수십 번 그 가사를 되뇌다가 기어이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베베.”라며 리듬앤블루스 식으로 추임새를 넣고 만다. 그러고 나면 즉흥적으로 선율 끝자락을 부여잡고 추임새를 더 확장해야 할 것 같은데, 그처럼 선율을 널뛰듯 흔들고 나야 직성에 풀릴 수도 있겠으나, 늘 즉흥은 뜻대로 되지 않아 엉뚱하게도 가사가 널뛰고 만다. 어쩐지 은혜라고 하니 ‘살아갈 수 없네’라는 말보다는 ‘사랑할 수가 없네’라는 말을 쓰고 만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운의 연인 같아지는데, 은혜는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어쩔 수 없이 은혜라는 이름을 지닌 연예인을 떠올린다. 그 연예인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한 하릴없이 심심파적한 공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남자는 조금 장난스럽게 미안하다. 아무래도 ‘사랑할 수가 없네’라는 표현보다 ‘살아갈 수가 없네’라는 것이 대체불가한 운명적 느낌을 준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라는 표현만으로는 품지 못하는 영역을 ‘산다’라는 단어로는 아우를 수 있을 것처럼 들렸다. 그녀를 향한 애절한 한마디를 ‘베베’로 마무리하는 것은 조금 가볍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새벽의 어둠이 다 가시기도 전에 남자는 세무서 주차장에 주차하고는, 5분 거리 내에 있는 교회로 향했다. 조용한 로비를 지나 2층 본당으로 들어가 늘 앉던 자리에 자리 잡고 기도를 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시작될 담임목사의 설교를 기다리며 새벽 찬송도 묵묵히 따라 했다. 앞에선 젊은 찬양 목사가 강단에 서서는 자신의 역할을 힘차게 해냈다. ‘아마 나라면 이 새벽부터 출근하라고 하면 못하겠지’라면서 목사님의 직장이 교회이고,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사명감을 지닌 목사님이 아니라면 교회도 직장일 뿐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토요일 새벽에 일찍 출근한 그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힘찬 목소리는 직업적 소명 덕분이었을까, 정말로 피곤함이 없었기 때문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자 피곤하지 않다면 혹시 평소 주간에는 푹 쉬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예배가 없는 평일에는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물론 나름대로 직장을 다니면서 알만큼 알 나이가 되었다고 자부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일이 없을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저 즐겁고도 힘차 보이는 모습이 과연 신앙심만으로 가능한지 의심하며, 결국 남자 역시 자기 한계에 갇힌 채로 목사의 상황을 판단하려고 하였다. 어째서 목사는 진정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하면 안 되는가? 이런 반성의 마음이 생기자 남자는 자신의 세계관이 좁았음을 인정하고 판단을 멈추었다. 그렇다. 젊은 찬양 목사는 자신의 사명감을 느끼고 뜨거운 마음으로 토요일 새벽에 강단에 올라 찬양을 인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여지껏 직장에서 느껴보지 못한 마음으로, 퇴근할 때도 어떻게든 조금만 일찍 퇴근하려고 상사들의 눈치를 살피는 세계에 있었기에 그 우주 너머의 또 다른 우주를 관측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관측하지 못하면 과학이 아니므로, 그로서는 목사의 진정성은 여전히 존재 가능한 어떤 것일 뿐 실재하는 진실로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진정성의 가능성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담임목사는 그날 바울과 뵈뵈에 관한 일화를 설교했다. 뵈뵈는 지역에서 유력한 사람으로, 집사의 신분으로 사역하는 신자였다. 그리고 여자였다. 그녀는 바울의 서신을 로마까지 전달하는 위험한 일을 했던 신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로마로 가기 위해 배를 타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데, 심지어 서신을 간직한 채 안전하게 이를 로마교회에 전달할 뿐 아니라, 로마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조언자로 참여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도 있었다. 바울은 그를 극진한 예우로 받아들일 것을 로마교회에 주문했다. 어쩐지 나는 양성평등이 뭔지도 모를 그 시대에 뵈뵈를 높이 평가하는 바울의 진보적인 자세에 감동했다. 동시에 뵈뵈라는 인물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물론, 그보다 더 예사롭지 않은 건 그날 하필 차를 몰고 오면서 ‘베베’라는 단어로 CCM을 오염시켰으나 이조차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어떤 당부의 말씀을 하고자 하는 의도, 혹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주목하고 있다는 표식으로 느껴지니, 설교가 점점 은혜로 다가왔다. 연예인이었던 은혜가 진짜 단어 그대로 하나님의 은총처럼 느껴졌다. 

  사실 전날에 월급날인데 어쩐 일인지 은행 통장에 잔고가 텅 비어 있었다. 매달 말일에 월급 통장에 있던 돈을 모두 다른 통장으로 옮기기 때문에 월급이 들어오기 전에 대개 통장 잔고는 만 원 이하였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 8시까지 잔고는 4470원이었다. 동료들과 회식을 가는 바람에 잠시 잊었으나, 설교를 듣는 와중에 미처 밤에 확인하지 못했던 잔고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마저도 은혜 있는 설교 덕분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상 일에 너무 연연하면 안 된다고 여겼다. 비록 승진 발표가 있었고, 동료 중 두 명이 승진하는 바람에 회식이 있었지만, 그 승진 심사에서 탈락한 것도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새벽의 설교란 그 정도의 위로쯤은 해줄 위력이 있었다고 믿었다. 

  더구나 ‘베베’는 ‘뵈뵈’ 같았다. 자신에게 무얼 설교할지 미리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마무리 찬양조차 가슴 벅차도록 아름다웠다. 찬양 목사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CCTV 감시하듯 자신을 일일이 보고 있는 하나님이 부담스럽다고도 했지만, 그 말에 조금은 동의하면서도 달리보면, 어차피 경찰도 아니고 누구에게 소문 낼 것도 아닌 존재, 심지어 남자로서는 볼 수도 없기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존재의 감시가 뭐가 부담스러울까 싶기도 했지만, ‘뵈뵈’의 설교 시간만큼은 이런 식의 관심이 나쁘지 않았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뵈뵈.”

   교회를 나오면서 뵈뵈라면 정말 은혜로 살아갔을 것 같았다. 은혜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남자 역시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싶었다. 심지어 전화로 확인해보니 잔고는 9시16분쯤에 원하는 숫자로 차 있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은행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네이마르 네이예”라고 개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역시 은행은 좋은 것이며, 어쩌면 네이마르와 같이 돈벼락을 맞은 축구스타로 살고 싶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피식 웃었다. 

  차문을 열고 승차하여 시동을 걸었다. 남자는 기어를 ‘D’에 맞추고 서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 재수강도 어렵다는 ‘D’에 의지하여 차가 움직여서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려 지그시 힘을 주자 차에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남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은혜’와 ‘사랑’과 ‘산다는 것’과 ‘베베’와 ‘뵈뵈’를 담담히 밀어내고 있었다. ‘뵈뵈’ 덕분에 토요일 하루는 은혜를 느끼겠지만, 월요일까지 담아갈 여운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모두 은행과 네이마르에 비하면 부족해보였다. 뵈뵈의 은혜가 남자에게 돈이 되어 몰려온다는 또 모를 일이다. 

  ‘이번 생에는 틀렸어.’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남자는 생각한다. 좌회전으로 코너를 돌 때 도시에 드물게 있는 조계종 사찰을 보면서, 다른 생애를 잠시 꿈꾼다.

  “윤회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라고 흥얼거리면서 이번 생에는 승진에 연연하지만, 다음 생에는 지드래곤으로 태어나길 바라는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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