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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Oct 30. 2023

김 작가와 청년

콩트


  새로운 소설집을 낸 김 작가는 강연회를 마치고 강연장을 나섰다. 그때 한 청년이 다가와서는 스프링으로 제본한 원고 뭉치를 내밀었다. 그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다가왔다면서, 부디 한 번만 읽어보고 감상평을 부탁드린다면서 연락처는 원고에 적혀 있다고 했다. 놀랍게도 A4용지에는 가지런하게 육필로 원고가 적혀 있었다. 요즘 컴퓨터로 타자화해서 원고를 뽑을 텐데, 조금 특이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그 특이함과는 달리, 청년에게서는 특이하달 것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에 대해서는 그 뒤로 떠오르는 것이 딱히 없었다. 그냥, 흔한 얼굴이었다. 모든 게 흔했다. 사실 그 원고 역시 육필이라는 것만이 특이할 뿐 첫 두 장을 읽는데, 흔하다 못해, 날것의 느낌이 강해서 비린 느낌에 원고를 덮었다. 나중에 읽어볼 것인지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그는 책가방에 원고를 꽂아 넣고는 다른 일정을 향해 그 자리를 떴다. 그것이 그날, 김 작가의 일정 중에 있었다.

  그러고 일주일이 흘렀을까?

  그는 작업실에서 새 단편 하나를 구상하던 중, 갑자기 그때 그 원고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 원고가 어디 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청년만큼이나 흔했지만, 정작 그것을 보고자 했을 때는 쉽지 않았다. 기억을 되짚다 보니 간신히 ‘그날 그것을 들고 와서는 거실 한쪽에 던져두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찾아냈지만, 이상하게도 그 스프링 제본 원고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분명 깨끗한 A4용지로 묶여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것을 연습장을 쓰려고 했을까, 싶을 만큼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빈 종이였다. 김 작가로서는 조금 이상했다. 자신의 기억이나 감각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원고를 찾아야겠다는 일념보다는 뭔가 이물감이 드는 그 때 그 일, 그 기억을 되찾아서 복원해보고자, 그 감각을 자신의 이성적 범위 내에서 이해할 수 있고자 하여, 그는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당시 강연회를 주도했던 출판사 담당자와 강연장의 책임자에게도 전화를 돌려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는 잠시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그 빈 원고 뭉치를 바라보았다. 분명 가득했던 육필은 모두 어디에 갔는지 가늠할 길은 없었다. 그냥 자신의 기억을 되짚고는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해야 했다. 그것이 합리적이었다. 애써 누군가 가방에 있던 그 물건을 바꿔치기 했다고 생각해보려고도 했지만, 그 순간, 그 청년의 원고가 무엇이 대단해서 그런 짓을 벌일까 싶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그 기억 나지 않는 청년의 원고에는 뭔가 비밀스러운 정보가 담겨 있고, 그 때문에 쫓겼던 것이고, 그것을 맡길 데가 없어, 자신에게 원고 부탁 명목으로 떠밀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피식 웃으며, 역시 그 청년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기억력을 탓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역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결국 그 청년에게는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어쩔 수 없는 감상평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누군가 훔쳐갔을 리 없고, 자신이 그 원고를 빈 채로 가지고 있으므로, 이 말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아마도 그 글자들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 거실 근처에 흩어져서 숨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청년에게 전해주었을 때 얼마나 그가 화낼지 상상하고 말았다. 조금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어차피 내봤자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글을 빈종이 그대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을 일’이라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김 작가 자신으로서는 그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글을 없는 대로 놓아두는 것도 괜찮겠지. 이런 의견을 못 전한 대로, 그도 조금은 실망한 대로 잊겠지’라며 약간의 미안함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일 년쯤 지났을 때였을까?

  김 작가로서는 뜻하지 않게 그때 쓴 단편소설로 이상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시상식장에서 그 청년을 다시 만난다. 그때 청년이 다가와 인사할 때는 잘 몰라봤지만, 발갛게 상기된 그는 김 작가에게 따지듯 물었을 때, 그때 그 청년임을 알아보았다.

  “그때 그 원고, 안 읽으셨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 소설에 담겨 있더군요.”라면서 목소리가 분이 난 채로 떨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난 읽지도 않았는걸.’

  김 작가는 그런 사정을 그에게 말해주었고, 그는 더 상기된 채로, 그런 거짓말을 믿어야 하는 것이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가 자신의 문장이라며 당선 소설 속 문장을 죽 읊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더구나 그 문장들은 아주 지엽적인 부분에 걸친 내용이었을 뿐이다. 설령 그의 말이 다 맞다손 치더라도, 그걸 훔쳤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아침에 그는 버스를 탔다”라는 식의 문장이 어떻게 표절일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청년이 그런 흔한 문장을 읊어대자, 다른 이들과 달리, 김 작가로서는 묘하게 께름칙해졌다. 그때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냥 상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때 정말로 그 원고 속 육필들이 거실 어딘가에 흩어져 숨어 있다가, 집 주인인 김 작가도 눈치 채지 못하게 그의 원고 속으로 숨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때는 피식 웃으며 그 쓸데없는 상상을 잊으려 했는데, 종종 호출되었던 상상이 그 청년의 입을 타고 다시 그의 몸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미안하군. 의도했던 건 아니었어. 문장들이 거실에 숨어 있다가 아무래도 종이가 좋았던 모양이야. 자기가 맞는 자리로 몰래 숨어드는 걸 난들 어쩌겠나?”라고 진지하게 답했을 때, 사람들은 김 작가가 미친 청년을 비아냥거리는 줄 알았다.

  오직 둘만이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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