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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Oct 24. 2023

시집은 다 읽어도 늘 다 읽은 것 같지 않아서

콜라주 & 빌드업

[소개글]
- 삼행시 등을 콜라주 재료로 활용하여 그림 콩트로 빌드업했습니다. 
- 이 중에 일부는 브런치스토리에서 공개했습니다.
- 이미지는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콜라주 재료]
- [삼행시]꿈속의 공기처럼 맴돌다가 호흡으로도 증명할 수 없게 된, 
- [삼행시]내성적인 슬픔이 몸치에 박치처럼 드러나서 
- [삼행시]쥐포와 한치 그리고 표주박 
- [삼행시]작가가 되고 싶었던 여자는 
- [삼행시]유한한 인생이란 한 순간의 지점에서 뜻밖에 






“시집은 다 읽어도 늘 다 읽은 것 같지 않아서, 항상 다 읽지 못한 책으로 남아있어요. 그래서 매번 펼 때마다 새 책을 읽는 것 같죠.”


 황- 무지는 엘리엇의 시다.

 우- 리는 그 시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어보았어도 시를 완독하지 못했다. 마치 

 림- 에게 이르는 길 같다. 그 길에는 표지판이 없고, 때때로 난해하다. 그립지 않아야 할 곳에서 그리움을 느끼는 난처한 경우도 생긴다. 유한한 인생이란 한 순간의 지점에서 뜻밖에 무한하기에.






시를 읽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을까요?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실제로 대학교에 들어가서 한두 해인가 시를 투고하기도 했었답니다. 연말의 신춘문예가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분위기였고, 사실 문예지라는 게 뭔지 모를 때였어요. 그럴 때 새해의 신문으로 우연히 당선시를 읽고는 나도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그때는 교과서 시만 알던 수준이라, 엘리엇의 시라던데 당시의 현대시를 읽으면서 뭐 이게 시인가 싶기도 했을 수준이었는데 말이죠.





→ 나, 온우림


그래도 고등학교 때 연습장에 시 비슷한 글을 끄적이곤 했었지요. 왜 중학교 때라든지 고등학교 때 명언 비슷한 메모를 예쁜 글씨로 써서는 돌려보는 아이들처럼 말이죠. 

그러다가 서태지를 알게 된 거였죠. 일대 쇼크였다고 해야 할까요? 모든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춤을 추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흐느적거렸을 뿐이죠. 옆 반에 황우림이라는 아이가 있는데 그렇게 춤을 잘 춘다고 하면서, 이름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비교 대상이 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죠. 






어기적, 어깃장.


이상하게 스텝이 꼬이며 옆으로 흐느적거리며 대오를 못 맞추고, 그러다 놀림을 받으면 어깃장을 놓곤 하였지요.

그런데 그때 저는 음악에 빠지게 되었죠. 서태지가 메탈이라면서 3집을 들고 나왔는데, 딩시엔 그게 청소년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얼터너티브록과 함께 멋진 장르처럼 들렸거든요. 뭔가 심오한 것으로 여기고 내가 아는 그 장르가 세상에서 진정으로 유일한 예술 장르처럼 느껴졌죠. 그럴 때도 있잖아요. (웃음)


자웅지지 좡지지. 롸크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알아가던 시기랄까요. 춤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요.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건 있었죠. 그걸 처음에 대차게 안다면 그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미련 없이 다른 일을 하면 되니까요. 물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절도 있었죠. 

문득 그에 관한 기억이 내성적인 슬픔의 이름으로 몸치에 박치처럼 드러나던 때도 있었죠. 점점 애잔함은 약해지고 곧 흐릿해졌지만요. 


이제는 그런 간절한 열망이 있던 시절도 있었구나 싶죠. 

품었던 많은 바람과 그리움이 이런 식으로 몸에서 빠져나가지는 않았는지 치성을 다해 생각할 일도 없어졌죠. 애매하게도 어떤 바람의 흔적은 이제 특별한 갈망을 일게 하지 않고, 심장 박동수에도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하죠.






“되고 싶은 건 하지 말라고 있는 것 같았죠. 영화가 좋아지면, 아, 이건 하지 말라는 거구나 싶었으니까요. (웃음)”






그때의 기억은 사야 할 음반 목록을 적어둔 다이어리로 남아있었는데, 얼마 전에 보니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버린 듯했죠. 슬램덩크 전권을 사촌동생에게 준 것만큼이나 치명적인 실수였죠. 심지어 밥을 굶어가며 모은 CD 중에 누구에게 빌려준 것인지 기억나지 않은 채 샀다는 기록으로만 남은 경우도 있었죠.






“우리집엔 제가 절대 샀을 리 없는 블랙메탈 앨범이 있었는데, 음, 온우림이란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온우림이 누구지 한참 생각했었죠.
한참 뒤에야 아, 그 대학 음감 동아리, 그 술 잘 마시던 여자애라고 깨달았지만요. 이미 늦었죠.
도서관에 미납한 책 같다고나 할까요. 몇 권 있어요.”






기억이 녹슬어버린 것인지, 당혹스럽더군요. 어디서 샀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는데 말이죠. 

그런가 하면 샀던 순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음반은 멀쩡히 있는데 말이에요.






그런 식으로, 어쩌면 치졸한 사랑 싸움과 처음처럼 설렜던 어떤 일이, 뽑힌 첫 사랑니처럼, 드릴의 아픈 느낌도 잊힌 채 모호한 기억으로 제 안에 숨어 있기도 하겠죠?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문득, 새삼 놀라듯 굴 수도 있을 거예요. 

러시아의 옐친이 죽었으니, 고르바초프도 고인인 것으로 착각하듯이요. 


처음에는 특별한 것으로 분류했다가, 시간마다 쌓인 특별한 일들 탓에 제가 그리워하던 일도 더는 그런 쪽으로 분류되지 않는 거죠. 그렇게 어떤 사람이나 추억이나 물건이  서서히 꿈속의 공기처럼 맴돌다가 호흡으로도 증명할 수 없게 된 것일지도 몰라요. 






새벽을 지새우며 적어두었던 아티스트의 이름과 음반명처럼, 페르난도 페소아의 이명 목록처럼, 적힌 기록이 사라져버리더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아쉽지 않은 것이죠. 그토록 소중했던 곰돌이 인형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버려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듯이요.

너는 나이고 나는 너라고 말하던 시절도 있을 텐데, 이제 너는 너라고 담담히 말하며 웃는 거죠.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책 속 메모 한 줄로 그를 잠시 기억하면서요.


“가지런한 오후의 분위기처럼 너를 잠시 생각하고.”






그때는 몇 번이 부러뜨리고 싶은 관계였지만, 데우고 식히기를 반복하며 울고 웃기도 하였지만요. 난롯가에 앉아서 끓는 물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이 정도면 잘 살았다 싶을 때도 있었어요. 제 명에 못 살지 싶었던 나날을 지나고 어떻게든 버텨낸 덕분에 어느덧 길 뒤로 사라져버린 어휘를 그리워하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절대적이라 여겼던 낭만의 언어와, 회사의 딱딱한 언어, 그 중에서 내 것만 남기고 하나씩 허무는 것도 괜찮았어요.”






표주박으로 동동주를 뜨면서도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여대생은 이제 없죠.  찌뿌둥한 날엔 막걸리에 파전이 최고라던 수학과 여학생도요. 건강을 관리해야 할 나이니까요. 과음하면 이제 너무 피곤하더라고요. 담배도 끊은 지 10년이 넘은 걸요.






이런 시절이 되자, 갑자기 예전에 잠깐 품었던 꿈이 다시 생각나더군요. 필사를 많이 했어요. 예전에 좋아하던 책을 하나씩 꺼내서 말이죠. 그냥 그렇게 문장을 따라가며 한 문장씩 곱씹다 보면, 또 그렇게 그 문장마다 제 의견을 메모하다 보면, 문장에 얽매인 덕분에 문장에서 해방되는 역설이 생각나더군요. 


삶에 얽매여서 삶에서 해방된다? 이렇게 바꾸면 좀 이상하려나요? 우주를 알고자 하나의 지점을 파다 보니 우주를 알 필요가 없어졌다? 뭐 이런 게 되려나요. 솔직히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럴 때는 그냥 문장을 오래 반복하게 되뇌어 보죠. 생각을 풀어줄 필요도 있으니까요. 






[나, 온우림]
“오래 전 그를, 내 마음에서 풀어줄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다고 제 마음에서 쉽게 사라지지도 않았지만, 저를 괴롭히지도 못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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