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민규 & 천재론3.1
[목차: 천재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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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민규: 틈새에 끼어 잠든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기
천재를 위한 보상이요? 사회에서 천재를 호출하는 거잖아요. 사회가 자기 역량을 확장하고 필요한 수요가 생길 때 적절하게 천재를 호출해서 호명해 주죠. 그때 천재에게는 사회적 권위가 생겨요. 적절한 일자리와 자격과 권위가 생긴다고 해야 할까요? 그 자격이 공적으로 분명하게 보장되기도 하지만, 관습적으로 모두가 그를 특별히 예우해주기도 하죠. 그래서 권위가 따라붙는 거고요.
그렇다면 결국 누군가 사회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흐름을 대표하면서 천재로 호출되었다면, 그 공헌에 대해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할 거예요. 오히려 안전한 과정을 따라서 관성적인 권위를 획득한 경우보다 가중치를 부여해서 보상할 때, 그 사회가 조금 더 진취적인 모험을 즐기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 역시 사회 내에서 용인하는 분위기여야 가능하겠죠.
예를 들어 가장 권위 있는 모습을 그려보고, 그 사이에서 애매한 위치에 처한 존재들을 추론해보는 거죠. 그들이 기존의 틀에 끼워 맞춰지지 않을 때, 그냥 그들이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주면 어떨까 했어요. 사회에서 우선순위를 매길 때 미뤄두었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죠.
우리의 경우라면 지식 분야에서 학자와 순수 문학가들이 떠올라요. 이들은 제도적으로 확고했죠. 하지만 그 등용문은 좁고, 또 다른 개성으로 자신들을 표현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죠. 그들은 대개 걸러지기 마련이에요. 지식의 한계 내에서 상상하면 한계는 확고해 보이죠. 사회에서 공인된 채 사이로 빠져나가는 가능성들은 쉽사리 무시되기 마련이에요. 분명 사회에 담겨 있는 가능성인데도 말이에요.
오귀스트 콩트를 일화가 떠오르네요. 콩트는 인류가 절대 알 수 없을 지식의 예시로 별의 화학적 조성을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30년 뒤에 천체분광학이 나와버린 거예요. (웃음) 인류 지식이란 게 결국 당대의 한계 내에서 상상한다는 점을 들 때 과학자들이 이 예시를 든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조금만 넓혀서 보았다면 30년 전이었다면 나름대로 사회에 예비되어 있을 사회적 유전자였을 텐데 말이에요.
하기야 체스를 이기고 나서도 한동안 바둑을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이길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죠. 꽤 오랜 뒤에야 이길 것으로 봤는데, 체스를 이기고 나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20년 걸렸나요? 상황으로 보면 충분히 예견할 만한데도 우리는 기존의 관습을 지키려는 관성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거로 여기기도 했었어요.
어떤 경우엔 아예 생각 자체를 지워버리기도 했는데, 어쩌면 지금 이뤄지는 많은 첨단의 발전 중에는 우리가 현재를 기준으로 만족하고 상상하기를 멈춰서 사회에서 없는 것처럼 취급받는 것들도 있을 거예요. 인공지능에 따른 후폭풍이나 유전자편집기술에 따른 것은 그나마 많이 거론되는 편인데도, 아직 먼 훗날의 일 같기도 하잖아요. 우리는 익숙한 상황, 지금의 권위, 관습적 체계가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하죠. 그 틈새로 우리가 잊은 중요한 혁신의 단서가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사실 패러다임의 천재조차 사실은 사회에 예비되었다고 봐요. 사회에 모든 유전 인자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죠. 그들이 테크니컬 천재라든지 보편성의 천재보다 사회에 환영을 덜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요. 전체를 흔들려다 보니, 훨씬 큰 부담이 생기는 것뿐이죠.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기득권에게 강하게 거부되니까요.
그런 면에서 일찍이 사회의 흐름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면 충분히 새로운 천재의 등장으로 예측되는 혁신적인 지점을 예견할 수 있어요. 그것을 냉철히 인지하여, 덜 진화한 분야를 의식적으로 조율하며 사회가 원하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존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관성이나 안일한 게으름 탓에 예견하기를 멈추고 수용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요.
한국 사회는 어떨까요? 게으른 편인 것 같기는 해요. 획일적이고 권위에 취약한 면이 있잖아요. 안정된 어떤 것이 정착된 순간부터는 주입식으로 그것이 어째서 좋은지 확신하며 강하게 구축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이해할 만한 부분도 있기는 해요. 우리의 경우는 시장이 협소하고 땅이 좁고 단일 민족의 개념이 보편화되다 보니, 비교적 단일한 흐름의 문화를 구성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지역별로 천차만별의 문화 공동체가 형성되지는 못해요. 사투리마저 표준어에 통합되는 흐름이 가능하죠. 유행이라든지 서울 중심의 편중을 고려할 때 획일화 통합화의 흐름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사회에서는 다원화된 양상으로 흘러가려고 해도, 범사회적인 주도로 흐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봐요. 기존의 권위 말고도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모험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데, 만일 창의성을 강조하며 무늬만 창의성이 아니라 정말로 창의적인 성과를 낼 때 압도적인 보상을 해준다면, 또 그들이 지속적으로 사회에서 활약할 무대가 충분하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친 듯이 경쟁적으로 창의성에 몰두할 걸요. 저는 창의성이 다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요. 기존의 안정되고 합리적이고 예상 가능한 틀을 좋아하는 편인데, 우리나라가 앞으로 선진 패러다임을 주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질 것을 고려한다면, 아무래도 창의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겠죠. 노벨상을 열망하기도 하잖아요.
우리나라에선 강박적인 연습 문화가 있고, 성적을 내는 데에 혈안인 습관은 당분간 바뀌지 않겠죠. 그 강조점을 창의성으로 향하도록 초점을 맞추어 준다면, 아마 반세기 안에 별 미친 창의성 퍼레이드를 펼쳐낼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분명 의미 있게 세계에 내보일 만한 놀라운 성과를 낼지도 모르죠. 조선 시대만 해도 꽤 여유 있는 양반 문화를 지향했는데, 불과 반세기도 안 되어서 빨리빨리 주입식 고속 성장 문화로 바뀌었잖아요. 강박적 열망도 바뀌면 좋을 텐데, 이건 한동안 어렵지 않을까도 싶어요. 단일한 분야에서 성공을 하게 하는 기준 자체는 시장이 협소해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문화적 획일성 때문에 생기는 부분을 고쳐서 창의성을 강조하더라도,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수출 주도로 살아남아야 하니, 해외에 수출할 만한 창의성을 우대해주겠죠. 그래도 지금처럼 외국을 후발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들을 주도해서 해외 시장을 창출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라면 분명 발전이겠죠?
아, 하지만 이러한 시도를 할 때 주의할 게 있어요. 참을성이 많아야 한다는 거죠. 많은 기회를 무차별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어요. 콩쿠르도 기존 방식대로 테크닉을 강조하며 수재를 선정하는 방식으로도 진행하고, 노골적으로 창의성을 보는 경우도 많아졌으면 해요. 기행도 많아지겠지만 그 점은 보완할 수 있을 방법이 있겠죠. 조건을 적절히 부여하면 창의성에도 각이 잡히니까요.
제가 제일 위선적이라고 여기는 게 창의적인 인재를 뽑는다는데, 사실은 그걸 객관적으로 설득시키기 애매해서, 결국엔 보편적인 기술력만 잔뜩 보고, 실수나 기본기 트집을 잡는다는 거예요. 그래야 이의 신청이 있을 때 객관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으니까요. 괜히 문제가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방식, 그게 수세적이고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만 더 나은 방향을 위한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죠. 교육에서 논술 점수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두고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 더는 창의적이고 사고력을 중시하는 평가로 발전할 수 없다는 사례가 떠오르네요.
그나마 사회에서 콩쿠르는 주최 측의 의지에 따라 창의력 중심으로 평가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죠. 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인재를 발굴해야 해요. 이때도 저는 솔직히 한 명만 뽑는 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봐요.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권위가 생기고 상업적으로 팔기에도 좋겠지만, 그것만 바라보고 매진한 지망생 중 한 명만 뽑고 2등부터는 무면허 낭인이 된다는 게요. 그래서 최근에 10등까지 뽑아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해주는 방식이 좋아보였어요.
적게 뽑는다고 그 인원이 다 살아남는 것도 아니라면 그냥 통과의례 중 하나 정도로 권위를 낮추고, 싹부터 자르지 말고 모두가 알아서 활동하도록 놓아두는 것도 좋죠. 사실 저는 등단제도보다는 그냥 어떻게든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들에게 완성작으로 상을 주는 방식을 선호하죠. 시작 때 기준에 따라 깎는 것보다 개성을 완성시킨 뒤에 그걸 보증해주는 것이죠. 그렇게 문턱을 낮추면 실패도 많다는 우려가 있는데, 좀 실패가 있고 이를 지켜보는 인내심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중에 누가 진짜 기대에 부응하는 천재로 성장할지 아무도 모르죠. 사회에서 요구하는 새로운 가치를 잘 반영할 사람을 찾으려 한다면 테크니컬 수재를 뽑는 콘테스트보다는 관대해야 한다고 봐요. 많이 뽑아놓고 낮은 확률의 소수를 찾아내는 거예요. 테크니컬 수재를 뽑을 때 이미 점점 그렇게 변하고 있지 않나요?
신춘문예는 정말 잔인한 제도였죠. 한 명만 뽑다니요? 그나마 그런 신인상 제도가 점점 시기별로 늘어서 다행이지만요. 외국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권위 있는 상을 많이 만들어내고, 그 뒤로도 보상이 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가는 것. 무엇보다 창의성을 강조할 때는 문턱을 낮추고 더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어서 판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대부분 실패하는 것으로 기본값으로 잡는 거죠. 많이 실패하는 가운데 의미 있는 하나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필요하다면 외국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해야 해요.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에서 세계적인 권위의 상을 줄 때 국제상을 기본으로 하듯이요. 우리도 점점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고요. 천재를 찾는 데에 효율적 투자를 운운하면 실패하기 마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