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원이 Feb 22. 2024

인용글 활용: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바깥의 글쓰기

[목차]

♬ 인용글 활용: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 탁월한 편집: '국화와 칼'과 교양서적

♬ 인용: 교양서 저술 때 유의 사항

♬ 재즈문화사: 교양서 주제 선택 때 유의 사항

♬ 목차 타이핑: 교양서 집필 때 유의 사항

♬ 인용 표기법: 교양서 집필 때 유의 사항

♬ 지식놀이: 편집인용과 그 사례

♬ 놀이글: 혼융인용과 코멘터리

♬ 르포 일기 수집: 교양서를 쓸 시간이 없다면

♬ 미디어비평: 코멘터리의 종류

♬ 트위터에서 보았던 기법 두 가지

♬ SF: 전자책과 링크 기법

♬ 직장인 창작: 미니픽션과 에피소드

♬ 미니픽션

♬ 에세이, 글쓰기의 멀티플레이어

♬ 상호텍스트성: 링크가 너무 많다는 건

♬ 1인칭 문학: 픽션에세이와 사소설

♬ 매드무비와 팬뮤직: 매쉬업과 리믹스

♬ 성경의 글쓰기 방식     



[소개글]

기존에 썼던 <글쓰기 외전>이라는 이름을 <바깥의 글쓰기>로 바꾸고, 프리퀄 방식도 아닌, 그저 워밍업의 기분으로 기존에 정리한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시민지성의 글쓰기> 방법을 고민하면서 머릿속을 맴돌던 기존 이야기를 한 번 더 정리하는 작업으로, 어찌 보면 기존의 내용에 주석을 다는 작업이었다. 이것을 예전 가제인 <글쓰기 외전: 과정과 놀이 편>에 포함하려다가, 그 방향성이 조금은 다르다고 판단하여 따로 묶는 작업을 하였다. 본격적인 작업물인 <글쓰기 외전: 스타일 Part1 / Part2> <글쓰기 외전: 대안 출판> <글쓰기 외전: 인식과 추론> <놀이글의 비평>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을 풀어쓴 것으로, 그 작업 때 집중하지 않을 지점에 대한 보완 상술이라 하겠다.





♬ 인용글 활용: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집 『픽션들』에 실린 단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보면, 삐에르 메나르가 ‘돈키호테’의 저자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돈키호테’의 창작자는 세르반테스다. 그러니 어이가 없는 장난이라고 여길 만하다. 실제로 다 읽고 나서도 그럴 수 있다. 보르헤스의 언급대로라면 300년 차이를 두고,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돈키호테’를 그대로 베끼더라도 그건 전혀 새로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좀 과격한 주장처럼 들린다. 저작권이 풀리더라도 저작권 윤리가 초강세인 시대에 이러한 주장은 일반 정서에 맞질 않는다. 아마도 저작권이 강세가 아닌 시절이라도, 베껴 써서 달달 외우려는 목적으로 유통하는 것도 아니고, 공자의 <논어>를 조선 시대 선비가 한 글자도 안 틀리고 그대로 필사해놓고는 자기 작품이라고 우기는 격이 아닌가.

그저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보면 새겨 들을 만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기사를 그대로 잔뜩 링크해놓고는 그게 창작글이라고 하면 문제가 될 것이다. 도용 중에서 뻔뻔한 도용에 해당한다. 누가 봐도, 그게 해당 블로거의 글이 아니란 걸 알기에 교활하고 치밀한 도용은 아니겠지만, 최근에는 그처럼 그냥 복사하여 붙이는 방식으로 남의 글로 공모전에 응모해서, 여러 수상을 하는 바람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내 경우에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대학교 때 팀이 발표한 리포트를 100% 내가 다 쓴 것임에도 나중에 알고 보니, 리포트를 판매하는 사이트에 누가 올려놓은 것을 10년 뒤에야 알았다. 아마도 그 수업을 듣던 학생 중 하나 아니었을까.

이런 것에 부정적인 정서가 있다 보니, 작가가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보여주는 표절을 넘어 그냥 무단전재와 도용이라 할 만한 행태를 두고 천연덕스러운 주장을 하는 것을 본다면,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표절이나 무단게재, 도용의 측면에서 보지 말고 살짝 각도를 달리해서 본다면, 이를테면 현대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려는 관점에서 볼 때, 제법 건설적으로 보르헤스의 주장을 현대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어떤 블로그를 의식적으로 촘촘하게 특정 정보군을 소개하는 사이트로 활용해보는 것이다. 게재글이 부담스럽다면 일부만 발췌하는 등으로 제한하면서 철저하게 원 텍스트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링크를 달아보는 작업이다. 이는 사실 많은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구축하고 있는 접근법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독서 감상문이나 음반 감상평을 남기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필요한 링크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한 아카이브를 꾸준히 구축한다면, 정말이지 수년 후에는 해당 블로거가 삐에르 메나르가 될 수도 있겠다. 기록 수집가로서 어떤 한 단면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블로그라면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고도의 전문적인 의견을 개진하지 않고도 미시적인 작업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성과를 올릴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아주 날카로운 안목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엄정한 수집 기준을 통하여 블로그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인용을 가볍게 보지 않고 그것으로도 시민으로서 유의미한 기록문화적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하면 조금 거창할까? 다만, 이럴 경우 출판을 한다거나, 진정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창작 위주로 저작자를 중시하는 것이 현 문화의 관행 때문이다. 단순히 수집을 할 때는 그런 마음가짐보다는 시대의 한 단면을 본다거나, 미시사를 수집해나간다는 심정, 성실한 기록자(수집가)의 심정으로, 블로그를 가꾼다면, 분명 유의미한 작업이다. 만일 독립출판의 형태를 인정하고,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더라도, 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정받는 분위기가 있다면,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유의미한 가능성이 커질 수도 있겠다.

물론 글쓰기를 염두에 두면서, 인용글이나 유용한 자료의 출처를 기재하는 작업 자체를 부차적으로 여길 수는 있다. 만일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수집만 하는 것은 너무 심심하다고 여긴다면, 인용의 마술을 고려해보는 건 어떨까. 방금 언급한 것에서 반 발자국만 나아가는 것이다.   

   

참조: 르네 마르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예를 들어, 르네 마르그리트는 일상적인 소재를 낯선 곳에 배치하여 독특한 효과를 발생시키도록 했다.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이다. 또한, 뒤샹의 경우 레디메이드 소변기를 뒤집어서는 미술관에 전시한다. 일상적이지 않은 배치와 공간의 이질감을 통해서 독특한 오브제 효과를 낳았다.      


참조: 뒤샹, ‘샘’     


단순히 기사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조리한 정보 사이에 배치함으로써 이질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 이때 링크를 걸어서 활용하여도 좋고, 한 포스팅에서 의도적으로 편집하거나, 순번대로 나열하는 방법도 있다. 이러한 이질적인 효과 중 대표적이고 가장 흔한 것이 영화에서 잔혹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정작 음악은 무척 서정적인 경우일 것이다. <레옹> 역시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이때 게리 올드만은 이어폰으로 우아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다. 이는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잔혹한 집단 폭력 사건의 배경음악으로 클래식 음악을 깔아서 그 폭력성을 한층 배가시켰던 전례를 따른다.

이럴 때 관객은 이질적인 정서를 경험하면서 불온한 균열을 느낀다. 이런 방식으로 낯선 위치와 설정 안에 소재를 바꾸면서 넣어보는 식으로 종종 활용한다면, 순수하게 인용된 재료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수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정교해질 때 종종 이런 작업을 ‘탁월한 편집’이라고 부를 수 있다. 비록 저작권 문제가 있어서 이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온전히 주장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름의 개성적 편집으로 자신의 지문을 자신만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심을 순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문예 비창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