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 콩트
배경: 장발장법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었다. 라면 한 박스를 훔쳤는데, 상습범이라서 그런지 3년 6개월 형을 받은 사건이 있던 때였다. 그런데 마침 그때 70억을 횡령한 유OO 회장은 3년형을 받았다. 이런 사건이 한 번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엄청난 중죄를 지어도, 라면 한 박스 훔친 사람보다 적게 산다면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농담이 돌았다.
#1 (크리스마스이브 이른 아침, 경찰서 유치장)
노숙자 병식, 제발 좀 감방에 가게 해달라며 자기 죄를 까발리며 떼를 쓴다. 그는 이미 상습범으로 알려졌다. 겨울만 되면 유치장이나 감방에서 추위를 피하려고 했기에 급 추위가 오는 날 전에는 어김없이 도둑질을 했다.
그러다 보니, 파출소에서도 모두 알았다.
경찰1: (인스턴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에효, 내일 추우려나 보군. 저 녀석 왔어. 이봐 김순경, 연락했어?”
김순경: “예! 연락했습니다. 이제 곧 오실 때쯤 되었네요.”
경찰1: “정목사님은 부지런도 하셔. 저런 녀석들 뭐가 좋다고 일일이 다 챙기니, 분명 천국 가실 거야.”
경찰2: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뒤적이고 있다.) “이거 보셨어요?”
경찰1: (커피를 마시며 소파 옆에 서 있다가 물음에 반응한다.) “뭐, 재미있는 거라도 나셨나? 영화보다 영화 같은 세상이라서.”
경찰2: “장발장법이라고 아세요?”
경찰1: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네…… 내가 그걸 알 거라고 생각하나?”
경찰2: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버무린다.) “하하, 그래도 우리 중에 법에 가장 해박하시면서…….”
경찰1: “장발장법이 뭔데? 장발장이라도 살아 돌아왔나? 빵 훔친 인간 아닌가? 프랑스에서.”
경찰2: “맞아요! 잘 아시네요. 씁쓸하네요. 글쎄, 라면 한 상자 훔쳤는데, 3년 6개월형을 받았다네요.”
경찰1: “상습 절도범인가 보군. 가중처벌되었겠고?”
경찰2: “맞아요! 오…… 해박…….”
경찰1: “뭘, 그쯤 가지고……. (우쭐하려다가 정색하고는) 지금 이 선배를 놀려먹나?”
경찰2: “아닙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씀이 다 맞는데요, 유병언이 70억 횡령하고 3년형 받았다네요. 어디 회장이더라…… (이름 생각이 안 나는지 얼버무리며) 그 회장도 사면 받아서 사실상 3년밖에 안 살았고요. 범털이라 교도소 생활도 괜찮았대요. 그분이야 뭐 그것도 힘들었겠지만. 하기야 이게 뭐 어디 한두 사람 이야기이겠어요?”
경찰1: “그러고 보니 그 장발장 좀 억울할 만하겠네. 라면 한 상자에 3년 6개월, 역시 돈 있어야 해. 대한민국에서는.”
이때 유치장에서 병식이가 애걸한다.
병식: “제발, 저를 좀 감옥에 보내주세요. 밖은 춥단 말이에요. 저도 라면 한 상자 훔쳐오면 보내주실 건가요?”
경찰들은 어처구니없이 병식을 쳐다본다.
경찰1: “야, 젊은 놈이 일해서 자리 잡을 생각은 안 하고, 라면 훔쳐서 감옥갈 생각부터 하냐? 그리고 아무나 장발장 하냐? 걔는 소설에도 나왔고, TV에도 나왔어. 너랑 싹수가 달라. 그러니까 마음 고쳐 먹고 목사님 따라 가서 다시는 여기 오지 말어!”
경찰들이 키득거리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병식은 어눌한 목소리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면서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
경찰1: (듣다 못해서) “야, 이 자식아, 너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아냐?”
병식: “돈이 있으면 죄가 없고, 돈이 없으면 죄가 있다!”
경찰들이 일제히 병식 쪽을 돌아보며 “오!”라며 야유 같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경찰1: “야, 너 똑똑하다. 그래, 그걸 아는 놈이 노력은 안하고 자꾸 여기를 기웃거려?”
병식: “저는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죄가 있고 감옥에 갈 권리가 있다고요!”
모두가 웃음 터진다. 겨울이 닥치면 좀도둑이 부쩍 는다. 그중에는 일부러 죄를 지어서 잠시 추위를 피해볼 요량으로 스스로 감옥행을 자처한다. 병식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정목사: “저기요, 여기 연락 봤고 왔어요. 잘 있었어요? 김순경.”
김순경: “예, 안녕하세요. 정목사님. 저기 저 친구예요. 며칠 전에도 연락드렸는데, 목사님께서 다른 지방에 출장 가셨더라고요. 다른 목사님들도 다 바쁘셨고요.”
정목사: “그래요, 그러면 제게 직접 연락주세요. 휴대폰 번호 아시면서.”
김순경: (머쓱해하며) “괜히 번번이 수고 끼쳐드리는 것 같아서.”
이미 유치장 문이 열리고 경찰2는 병식을 밖으로 나오라고 한다.
경찰1: “야, 빨리 안 나와! 자꾸 그러면 영원히 가둬둔다.”
병식: “그건 또 아니죠. 시민을 아무 죄 없이 영원히 가둬두면 안 되죠.”
그래도 병식은 교회에 가면 추위를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선선히 따라나선다.
경찰1: “너 인마, 다음부터 여기 오지 말어. 목사님 따라 가서 열심히 살아. 또 오지 마. 또 오겠지만서두.”
정목사와 병식은 경찰들과 인사를 하고, 경찰서를 나선다.
#2 (용산역 화장실)
목사님이 그와 함께 파출소를 나선다. 하지만 그들은 곧장 교회로 가지 않고 용산역에 들른다. 용산역 화장실에서 사람들을 부른다.
정목사: “거기 누구 없어요? 민호야, 경식아!”
이미 익히 아는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병식: “어제 얼어 죽었나?”
정목사: “거참, 말 함부로 하네?”
정목사가 순간 째려보자, 병식은 모른 척한다. 하기야 용산역에서 추위를 피해 화장실에서 자는 사람이라면 언제 죽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그래도 용산역 화장실이라도 있어서 추위 걱정을 덜 수 있는데, 늘 경쟁이 심하다. 화장실 경쟁자들끼리도 그 와중에 힘겨루기를 할 수밖에 없다.
병식: “얼굴이 갈렸네. 힘에서 밀렸나? 뜨내기가 토박이 밀어내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정목사: “오늘 교회 가면 그래도 맛있는 거 먹을 텐데. 나중에 다시 와보지. 그런데 민호와 경식이를 아나?”
병식은 머리가 희끗한 정목사를 보면서
병식: “아니, 여기서야 한번 보면 아는 사람이고, 이름 익숙하면 기분에 따라 호형호제 하는 사이도 되고 그러죠. 아시면서. 밥만 주면 다 친해져요. 대신 감방에도 가줄 수 있고.”
정목사: (미간을 찡그리며) “알았으니 일단 교회로 가지.”
이때 새로 여자 화장실 쪽에서 겁을 먹은 채 흘끔거리던 여자 아이와 어린 동생이 여자화장실에서 나온다. 아무 말도 안 한 채로 목사 근처를 서성인다.
정목사: “너희도 여기서 지냈나 보구나?”
여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목사: (웃으며) “그래, 너희도 가자.”
#3 (용산역 광장)
목사님은 그들도 데리고 교회로 향하려는데, 마침 용산역 광장 햇볕 드는 곳에 눕고는 신문지를 덮으려는 노숙자를 본다. 규현이다. (종종 그런 이들이 있다. 신문지는 생각보다 따뜻하다.)
정목사: “이봐요. 같이 교회로 가죠? 규현 씨라고 했던가?”
규현: (신문지를 살짝 치우고 정목사인 것을 보고는 다시 신문지를 얼굴에 덮으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귀찮아요. 그냥 가세요. 생각 있으면 이따 갈게요. 거긴 가면 자꾸 기도하라고 해서 귀찮아요.”
규현은 심기가 불편하다. 어제 감방에 가려고 절도를 시도하고 파출소에 잡혀갔으나 병식처럼 상습법으로 찍혀서 그대로 밖으로 내쫓겼기 때문이다. 그때 정목사가 다른 데 출장이어서 규현을 만나지 못했다. 보통 1년에 3-4번은 얼굴을 보곤 하는데, 최근에 6개월 이상 규현과 보지 못하던 터였다.
정목사: “오랜 만에 봤는데, 그래도 교회 가서 따뜻한 밥이라도 먹고, 광장에 누워요. 아니면 교회에서 아무것도 안 시킬 테니까, 잠이라도 자고 갑시다.”
그러자 규현이 되레 묻는다.
규현: “오늘 밥은 뭔데요?”
그때 신문지에 쓰인 장발장법 뉴스를 보고는 경찰서에서 떼를 쓰던 병식이가 아는 척을 한다. 장발장법 사건 내용을 정확히 모르면서 유식한 척 굴며 촌평하려고 한다.
병식: “아따, 여기도 장발장법으로 시끄럽구먼. 규현 형님, 거기 신문에도 온통 장발장이네.”
규현: (별 관심 없으면서) “그게 뭔데?”
당연히 병식은 장발장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럼에도 아는 척한다.
병식: “뭐라더라? 그러니까…… 라면 한 박스 훔쳤는데…… 재벌처럼 3년 6개월이나 감방에서 살 수 있다는 법이지! (비로소 부조리함을 느끼고는 발끈하여) 이거 완전 특권 아니여? 아니, 왜 누구는 보내달라고 애걸을 해도 안 보내주고, 누구는 라면 한 상자 훔쳤는데 재벌 대우를 하는 거지?”
규현: “그 자식, 라면 몇 개 판사에게 찔러주었나 보지. 누구는 감옥에 들여보내주지도 않고, 완전 불공평하네. 인생이 왜 이렇게 꼬였는지, 나는 그런 재주도 없어. 라면 있으면 그거 아까워서 어떻게 판사에서 찔러주겠냐고. 잘 되는 놈은 역시 배포가 있어. 참 더럽다, 이놈의 세상. 위에서나 밑에서나.”
규현은 신문지를 들고 읽지도 못하면서 글자를 거꾸로 하고는 읽는 척한다. 정목사는 어쩌지 못하고 그저 당혹스럽다.
규현: (말하다가 화가 더 돋는지) “아이고, 억울해서 못 살겠네.”
결국 이대로 못 있겠다면서 그냥 목사님을 따라 나선다. 따뜻한 밥이라도 먹을 요량이다.
#4 (교회)
무대가 암전된 상태로 정적인 성탄절 노래 <실버벨>이 조용히 흐른다. 서서히 불이 무대에 들어온다.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이 보인다. 그들도 처음에 퉁명스러웠고 비협조적이었지만, 점점 일을 준비할수록 자기들이 더 열성적이다. 그 느낌을 한 프레임 내에서 정적으로 연출한다.
퉁명스러운 규현이든, 협조적인 여자 아이들이든, 그저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할 수 없이 일하는 병식이든 “파티를 하면 재미있을 것”이라며 설레기도 한다.
성탄절 노래가 들리고, 누군가 “눈이 온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모두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소리만 들린다. 눈사람을 진짜 잘 만든다면서 아주 크게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즐거워 하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