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과 추론(147~149F)
글쓰기 외전: 인식과 추론
◑ 전체 원고 콘셉트 및 진도 상황
- 매거진 방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다양한 저자를 섭외하지는 않고 단독으로 작업하였습니다. 매거진에서 다양한 글에 다양한 필자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다중 정체성의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처럼 고흐 이미지를 배치하고 여러 스타일의 글과 함께 구성하였습니다. 픽션 매거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매거진 놀이로도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원고의 경우 전체 흐름에선 사실과 경험을 토대로 하되 종종 일관된 방향성을 띠되 원활한 개진을 위하여 허구적 설정을 삽입하였습니다. 대체로 경험적 정보로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 총 173프레임으로, 상황에 따라 약간 바뀔 수 있습니다. 현 발행글은 147~149프레임에 해당합니다.
◑ 삼천포에서 산책하기: 사실은 전문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미학적 주제, 그럼에도 숭고미에 관하여
(베토벤의 교향곡 9번에서 흔히 거론되는) 숭고미를 논할 때 보통 세 가지 층위쯤은 기본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숭고미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겠다. 미학적인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미’라는 개념이 실재하는지를 묻는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이며 절대적인 면에 집중하게 된다.
둘째는 숭고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 그 풀이법을 고민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경험을 하기 전에도 우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안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형이상학이나 관념론에는 그러한 것이 의외로 많다. “난 인정 못한다”라고 하면 상대가 “그러면 논의가 될 수 없다”고 말해버릴 수밖에 없다. 종교 논쟁과도 유사한 면이 생긴다. 둘이 만나서 숭고미를 떠들면 한 쪽은 자기가 느끼고 있으니,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있으니 구체적인 면을 묘사하게 될 것이요, 베토벤 음악 듣고 빵빵거리다가 늘 5분 만에 자신을 잠들게 했던 경험의 소유자는 상대의 묘사가 구체적일수록 사기극에 휘말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열이 받은 숭고미 신앙자가 객관적으로 합의하는 지점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할 수도 있다.
결국 셋째는 인식론적이고 관계적이며 상대적인 개념을 살피게 된다. 도무지 숭고미가 있다는 자체를 증명할 수 없다면 드러나는 현상이나 반응에서 추론하여 그 존재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 이때 흔히 사람들에게 숭고미를 느끼냐고 물어볼 수 있다. 수많은 인종과 나이, 성별, 문화권 등등 여러 사람에게 설문조사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언어와 비언어적 반응을 심리학 등 과학을 동원하여 추려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베토벤 음악을 듣고는 “숭고하다”라고 표현하지는 못해도 숭고라는 개념에서 흔히 유발되는 여러 유사 정서나 반응 군을 추려서 숭고미의 존재 가능성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설문 조사가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숭고미가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이 어떤 대상에서 반응을 느꼈는지 명확하지 않은데 혹시 오디오에서 반응을 느낀 것은 아닐까? 인간은 과연 대상에게만 반응하는가? 등등 여러 문제를 고민할 수도 있겠고, 그 방해 요인을 다 걷어내고도 베토벤 음악을 들은 이들이 "지루하긴 한데 좋은 건 정말 눈물 나게 좋네요"라는 반응을 듣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외부적 자극으로 내부적 정서 지도가 재편되어 숭고미와 유사한 효과가 나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결핍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 없어졌다는 표현이다. 언어로 표현하면 결핍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결핍은 없다는 것을 임의적으로 언어 표기한 것이다. 음에서도 길 에반스는 실제로 없는 음을 들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곤 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하나만 더 예로 들자면, "바보 바보 바보"를 계속하면 "보_바보_바"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때 빈 틈이 결합하여 들리지 않는 중간 음절이 생기는 효과가 있다. 리듬도 그런 습관을 이용하는데 이것은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관계적이고 임의로 수시로 순간적으로 재편되는 끊임없는 어떤 운동의 흐름 속 작은 효과라고 해야 할까?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수용하여 감각하는 이들에게는 분명 존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어떤 것일까? 숭고미도 그런 것일까? 아닐까? 그런 것도 존재하는 것일까? 아닐까?
결국 “인간이 반응을 할 때 반드시 반응의 중심이 되는 외부적-실재적 대상이 있다”고 가정하고 만다. 그러고 그 명제가 맞는다면 숭고의 유사한 군을 묶어둔 여러 반응이 몇 % 이상 되었을 때 어떤 대상, 즉 베토벤의 음악과 그 주변이 결합한 어떤 대상에 반응한 것이 숭고미에 반응한 것과 같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를 듣고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라며 하품을 하면서 코딱지를 파던, 그러니까 베토벤의 교향곡을 오뚜기 3분 자장가로 알고 있던 사람으로서는 그냥 무심코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모기는 그 소리 들으면 귀청 터져서 죽어요. 숭고미는 무슨. 한 시간짜리 공포지. 하루살이에게는 청춘의 세월이 공포로 점철된 것이고.”
그러면 다시 인간에게 숭고한 것이 숭고미인가? 그러한 관계적 개념에서 숭고미라고 한정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객관적으로 숭고미가 존재한다고 쓰려면 모든 상황과 조건과 반응 대상에게도 결과가 유사하거나 똑같아야 할 것이라며, 베토벤을 원망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내게 숭고미는 숙고미가 된다. 순고민이 되거나. 결국 지쳐서, 내 말을 내가 이해하기 싫어서, ‘술 고민’이나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