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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섞지 않은 순간만큼은 외국어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에세이: 외국어영역

by 희원이
♬ 말을 섞지 않은 순간만큼은 외국어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영원히 그럴 순 없고


학생들은 등굣길에서 말을 섞지 않았다. 각자가 바쁘게 학교를 향해 걷거나 무리가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이 다였다. 그 소리는 그들 안에 갇혀 있을 뿐, 특별한 내용으로 옆을 걷던 학생에게 전달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을 이랬는지, 일일이 세어본 적은 없다. 정적에 휩싸였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졸린 표정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풍경은 약간은 기계적인 느낌을 주었다. 대개 우리 입에서 언어는 멈추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외국어도, 모국어도 머릿속에서 소리 없이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언어는 마치 목구멍 깊숙이 가라앉은 무언가처럼, 목이 간질간질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외국어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시험 전날 밤에 외우던 단어들이나 발음을 신경 쓰며 혀를 굴리던 그 긴장감이 잠시나마 사라진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함께한다. 언제, 어디서든 말을 꺼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조립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소통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게 만드는 일이다. 모국어보다 덜 쓰이는 외국어를 통해서 모국어를 쓰는 습관을 어렴풋이 감지하는 셈이다. 외국어가 입 밖으로 나올 때 모국어를 안으로 삼키며 모국어를 쓰던 습관을 뒤로 물림으로써, 역설적으로 모국어를 기다리는 셈이다. 그래서 어떤 언어든 그 언어를 말하지 않는 시간만큼은 해당 언어로부터 일시적인 자유의 순간을 얻지만, 동시에 그 자유의 순간에 말하지 않은 언어의 흔적에 깊이 묶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유는 언제나 제한적이다. 그렇게 언어는 삼켜지고 그 언어로부터 제한적으로나마 자유로워질 때 언어다워지는 담금질이 된다. 다만 그 언어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한계가 있어서, 그 시간보다 짧으면 또다시 호출되는 언어는 뜻밖의 탄력을 유지하지만, 그 시간보다 길어지면 기다림에 지친 그 언어는 끝내 무뎌진다.


외국어를 오래 말하면 모국어가 밀려났고, 모국어로 오래 생각하면 외국어가 밀려났다. 그러면서도 어느 쪽도 쉽사리 지울 수 없었고, 지워지지 않았으며, 서로에게 불편하게 묶여 있었다. 외국어는 자신이 손님인 것에 심통을 부렸고, 모국어는 자기 자리가 좁아진 것을 투덜댔다. 특히나 회화 시험이 있는 날에는 어쩐지 모국어를 잠시 가두고 영어로 생각하는 노력을 기울이곤 하였다.

그럼에도 어쨌든 언어는 입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언어다워진다. 머릿속에 갇혀 있는 언어는 그저 흩어진 음절과 단어들이다. 그 단어들은, 아무리 내가 알고 있다 한들, 소리로 꺼내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전달될 수 없다. 언어가 진정으로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알아듣는 존재에게 가닿아야 한다. 혼잣말은 언어의 시뮬레이션일 뿐, 진짜 언어는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고, 마음에 닿아야 그 존재 의미를 갖는다.

언어는 마치 숨을 참고 있다가 물속에서 나오는 순간과 같다. 오래 참으면 참을수록, 한 마디를 내뱉는 그 순간은 더욱 강렬하다. 그러나 그 말을 알아듣고 반응하는 존재가 없다면 그 언어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던 외국어 단어들은 입술을 떠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고요한 순간에 말을 섞지 않으며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결국엔 그 자유도 기다림을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을 섞지 않는 순간만큼은 외국어의 부담에서 해방된 듯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국 언어는 우리 삶의 일부다.

소리를 내는 순간 어쨌든 상대는 나를 본다. 상대가 소리를 내는 순간, 어쨌든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 물론, 언어는 들려오는 소리가 다가 아니며, 그 소리를 이해하고 답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언어의 역할이 완성되지만, 일단 소리(몸짓)를 내지 않으면 언어는 애초에 드러나지 않는다. 비록 서툴더라도, 말하는 것이 낫다.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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