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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서 올린 점수, 영어로 밀어내기

에세이: 외국어영역

by 희원이

재수 시절은 마치 무대에 올라가 나 홀로 독주회를 여는 기분이었다. 수학이라는 악보를 앞에 두고 매일, 매 순간 실수를 고쳐가며 연주하던 날들이었다. 처음에는 악보가 전혀 읽히지 않아 답답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손끝은 복잡한 문제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수학 문제 하나를 붙들고 2시간, 아니 4시간씩 고민하며 답을 보지 않고 끝까지 시도하던 그때의 나. 힘들었지만, 그렇게 애를 쓰고 답을 본 문제는 절대 잊히지 않았다. 직접 부딪치며 알아낸 문제는 숫자가 바뀌고 모양이 살짝 달라져도 마치 내장된 방어기제처럼 빠르게 해결되었다. 그 고생 덕에 마침내 수학에서 서울대 법대 수준의 점수를 받게 되었으니, 수학이라는 무대에서는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았다. 특히 그때 다녔던 학원은 자습 관리에 철저했다. 수업이 끝나면 자습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내 스케줄의 반 이상이었다. 그리고 자습실 자리마다 놓인 작은 TV와 비디오 기기 덕에 학원의 자체 강사들이 만든 수학 비디오를 보며 복습할 수 있었다. 수학 비디오는 내게 일종의 마약 같은 존재였다. ‘더 보라’는 속삭임에 이끌려 다른 과목을 제쳐두고 수학 비디오를 반복해서 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수학이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수학 선생님이 특별히 눈길을 끌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외모의 남자 선생님이었고, 그저 잘 가르쳤다. 그의 수업은 수학의 언어를 일깨워주는 일종의 통역과 같았다.

그러나 영어는 달랐다. 영어는 한 번도 온전히 다가오지 않았다. 수학에 지나치게 몰두하느라 소홀했던 탓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영어를 문법적으로 따지면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했지만, 이상하게 늘지 않았다. 그러니 점점 수학에 더 파묻혔다. 또 집요하게 수학 문제를 풀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해결될 때의 기쁨은 대단했다. 다만 그만큼 수학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기는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일화에 대해 훗날에 초등학생이었던 한 아이가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수학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영어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망한 거 아니에요?”

그때는 웃고 넘겼지만 어찌 보면 간명했다. 아, 그랬구나. 수학을 노력으로 극복한 게 아니라, 그만큼 영어를 소홀히 한 거로구나. 뭐지? 왜 그때는 수학을 정복하는 경험에 취해서, 그 때문에 영어 점수가 내려앉는 걸 몰랐지? 그냥 영어를 못해서 그랬다고만 오래도록 생각했다.


실제로 당시 수능에서 영어 점수는 부진했다. “동 점수의 수험생과 비교할 때 외국어영역의 점수가 현저히 낮다”는 평가가 성적표에 적혀 있었다. 그 평가를 볼 때의 씁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학 점수로는 자랑스러웠지만 영어는 내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영어가 붙잡은 발목 때문에 영어만 원망했는데, 영어의 발목을 수학이 붙잡고 있었고, 그 수학의 멱살을 내가 붙들고 있는 모양새였다. 수학만 이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 물고 물린 것인가.

그렇게 고등학교 3년 동안 공부했다면 서울대에 입학할 만큼의 성과를 냈을 거라고 농담을 하곤 했지만, 그래서 짧은 기간이라 수학을 정복하느라 영어를 소홀히 했지만, 3년 동안 계획을 짜서 했다면 결국 영어도 원하는 만큼 성적을 올렸을 것이란 가정은 그저 가정일 뿐이었다. 솔직히 돌이켜보면 지치고 피로에 짓눌려 더 이상 힘을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그 시절의 공부가 무엇을 남겼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바짝 집중해서 끝내는 것이 좋다는 깨달음? 아니면, 수학에 몰두하느라 놓친 영어에 대한 안타까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때처럼 그 무엇에 이토록 간절하게 집중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난 조금만 지쳐도 취미 생활마저 포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온전히 지원을 받아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더라도 그렇게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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