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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을 축하한다'는 말에 관하여

에세이

by 희원이

“이직을 축하하며”

평생직장이란 말이 무색해지면 ‘이직’은 삶에서 몇 번은 겪어야 할 필수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이직이 좋지만은 않은, 그러나 대개는 노년의 시간을 뒤로 미루기 위해서 이직을 하여서 말년을 대비하곤 한다. 이 경우에는 이제 대기업에서 정점을 찍고 하향하면서 그래도 여전히 경제인구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쉽게 말해서 “놀면 뭐하니” 정신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럴 때는 서로가 표정과 말을 아끼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에게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응원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퇴직을 축하하는’ 경우와도 비슷하겠으나, 이직의 경우에는 조금 더 이른 나이에 권고사직과도 유사하게 찾아오는 경우도 많으므로, 반드시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축하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겠다.


우선, ‘결단의 축하’일 때가 그렇다.

때로는 이직이 한 사람의 결단력을 증명하는 사건이 된다. 별로 좋지 않았던 직장, 매일 아침 출근길을 한숨으로 시작하게 했던 환경, 혹은 나쁜 상사 밑에서의 힘겨운 시간들. 그런 이유들로 인해 이미 떠나야 했던 자리였지만, 그 결단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함에 머무르려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다. 어떤 지긋지긋한 마수에서 벗어나는 결단이었기 때문에, ‘아이고, 암 걸리겠네’라고 반복하여 자조하느니, 살 길 위에 달아나는 데 성공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어려워보이나, 수명이 알게 모르게 연장되는 셈이다. 그러면 일할 날이 길어지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사는 게 더 낫다면, 충분히 좋은 선택이다.

"결국 해냈구나."

이런 마음으로 던지는 축하의 말은 단순히 새로운 출발을 격려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은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존경을 담고 있다. 암에 걸릴 것 같거나, 서서히 말라가면서도 차마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짜릿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이직은 단순히 직장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너무 잘 되면 괜히 배가 아플 것이고, 너무 안 되면 자신은 영영 탈출하지 못한다는 못이 박힌 채 판타지가 메말라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정말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의미다.

때로는 단순히 "좋은 직장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축하를 받을 수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잠깐 동안 배가 안 아프다고 믿을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다. 그래서 직장 동료가 더 나은 곳, 그래서 직장 환경이 좋아지고, 연봉이 오르고, 동료와 상사가 더 나은 사람들로 채워지는 곳으로 향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큰 축복이다. 그렇게 믿기를 바란다. 적어도 하루 정도는.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자.

"더 나은 환경에서 더 멋진 일을 하게 되었으니 축하해!"

이 축하의 의미는 새로운 직장과 함께 시작될 가능성과 희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와 설렘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직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얻은 사람에게 이보다 더 적합한 축하의 말은 없다.


셋째, 뜻밖에 이직의 주인공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혹사당했던 자신을 축하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죽어라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가 사라져버리니, 이제 좀 살만해지겄니 하는 바람이 담긴 자축인 셈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가 살아야 남도 돌아볼 수 있는 존재이므로, 가끔은 축하가 사려 깊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안도감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떠난다고? 진짜?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너무 아쉬워요!“

입에 발린 거짓말과 눈에 넣은 인공눈물로 이별을 한 뒤, 집에 와서는 맥주와 케이크로 자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운명의 신은 내가 그를 죽이는 것보다는 그의 퇴장을 택하셨구나.”


마지막으로, 그거 아는가? 상황적으로나 문법적으로나 억지인 줄은 아는데, ‘이직’이 그냥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이직을 축하한 것은 그의 생일일 수도 있고, 승진이나 상을 받은 날일 수도 있다. 앞서도 말했다.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도 하루쯤은 안 그런 척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혹시 이직이 결혼할 상대라면서 자신이 오래 전부터 짝사랑하던 회사 동료를 모두에게 소개시켜 준다면? 내면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는 성모 마리아상이 될 수 있겠으나, 다시 한번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도 하루쯤은 안 그런 척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물론 이 축하의 말이 어떠한 맥락에서든 진심이라면, 그 마음이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거나, 감당할 만큼만 축하할 일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점에는 우리는 대개 운명의 사촌지간인 셈이다. 땅을 샀다는 소식에 배가 아픈 것을 안 그런 척하기는 힘들 때가 많은 것을 보니.

잘 생각해보라. 친척지간이 아닌데도 괜히 배가 아픈 적이 없었는가? 알게 모르게, 다 사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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