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2006년 1월 뉴욕의 정신과에 한 여성 환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현실에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성이 자주 꿈에 나타난다며 몽타주를 그렸다. 그리고 며칠 뒤, 다른 환자가 다시 이 병원을 찾았고 먼저 병원을 찾은 여성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이 그린 몽타주 속 남성은 비슷했다.
흥미를 느낀 정신과 의사는 몽타주를 동료 의사들에게 보냈고 4명의 환자로부터 같은 남성을 꿈속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 의사는 ‘이 남자'를 현실에서 찾아보려고 인터넷에 웹사이트를 개설했고 2006년 1월부터 현재까지 ‘이 남자'를 꿈속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답한 이들만 미국 독일 중국 로마 러시아 프랑스 인도 등 각지에서 2000여 명이 넘는다.』1)
믿기지 않는 일이긴 하다.
그나저나 이 남자는 대체 왜 그 많은 이들의 꿈에 나타나는 것일까? 텔레비전에 나왔던 인물이라면 이렇게 찾는 것이 어려울 리 없다. 그렇다면 꿈을 꿨던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가는 장소를 자주 지나다니던 인물인가. 그러면서 자주 눈에 띌 만한 행동을 하는 인물이란 말인가.
당시 “이 남자를 찾기 위한 노력은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까지 이어졌다. 미국 LA와 독일 베를린, 브라질 상파울로, 영국 런던 등 각지의 길거리에 ‘이 남자'의 몽타주가 담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 정도로 반경이 넓다면 단순히 어떤 거리를 지나던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너무도 확실하게 드러난 얼굴 생김새를 보고 있자니, 뭔가에 홀린 듯한 느낌도 든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과 커다란 입이 특징. 왼쪽 가르마에 대머리 기질이 보이는 이 남자”는 대체 누굴까? 이토록 인상착의가 확실하게 드러난 사람이 전 세계를 동시에 누빈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과학을 조금만 배운 사람이라면 모두 안다.
이쯤 되면, 미스터리 추리물이나 SF의 영역으로 오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볼 수도 있으므로, 판타지적 요소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해프닝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단지 마술적인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혹여 누군가 주술을 걸어놓은 것이 아닐까.
예컨대, 한 남자가 마을 사람 K의 원한을 산다. K는 그를 골탕 먹일 고민을 하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축구선수 호날도에 대한 기사를 읽는다. 내용인즉, 누군가 의뢰하여 아프리카의 부두교 주술사가 호날도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 주술사는 선수가 올해에 부상을 당할 것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K는 드디어 방책을 찾은 것이다! 그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주문을 걸어줄 만한 사람을 찾았고, 오랜 세월 사람의 운명을 다루어왔다는 한 심령사를 만난다. 심령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을 끌어와 의뢰인 K가 맡긴 사진에 심는다. 그때 남자는 까닭모를 열병을 앓고, 이틀 후 낫는다. 다만 그 열이 증발하듯 사람의 무의식도 사진에서 함께 증발했다. 그때 무의식들만 증발했다면 좋겠지만, 그것들에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무의식들은 사진에 있었던 남자의 기력을 조금씩 담아서 자신의 주인에게 돌아간다.
이때부터 남자는 알 수 없이 무기력하다. 매일 밤 자신의 기가 다른 이들의 꿈에서 복무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꿈을 꾸어야 하는 이들이라고 편안할 수 없다. 생전에 본 적도 없는 이가 지속적으로 꿈에 나오니 괴이할 뿐이다. 심령사는 하나의 주문을 걸기 위해 수많은 부작용을 무시해버리는 초보였던 셈이다.
결국 꿈꾼 사람들이 정신병원을 찾았고, 오래지 않아 기사를 읽고는 그들이 그린 몽타주가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순한 우연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의문투성이의 남자를 찾기로 결심하고는 포스터를 내걸고 남자의 행방을 좇는다. 남자 역시 이를 나중에 알고는 꿈을 꾼 이들을 찾는다.
하지만 도대체 정확히 몇 명이 자신을 꿈꾸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한 사람당 자신의 기가 얼마씩 배분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자칫 자신의 기를 되돌려 받으려다가 다른 이의 기까지 빼앗아올 수도 있어 난감하다. 꿈꾼 이들 역시 남자가 이상형이 아니라 매일 밤 곤란했지만 꾹, 참는다.
특히 남성들로서는 여성들보다 훨씬 곤혹스러웠다. 이들은 불평하는 것을 넘어서 절규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로서도 굳이 밤마다 시커먼 사내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일 밤 ‘오, 제발!'을 애처롭게 외쳤을 것이다.
이 사내의 무단 출현만으로도 장르는 미스터리 추리물이나 음울한 SF를 넘어, 제법 잘 만들어진 공포물일 수도 있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에게 왜 이 사람이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미스터리 추리물의 음모나 어둠보다는 판타지의 말랑말랑한 상상이 나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심심하다면, 슬픈 사연 하나쯤 구상하여 이 이야기에 덧붙이면 된다.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하다. 관객들이 꽃미남을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외모 탓에 관객의 감정이입이 쉽지 않을 게 뻔하다. 십중팔구 흥행 면에서 크게 낭패 볼 게 뻔하다고 걱정할 것이다. 일반 남성들에게는 퀴어물일 수밖에 없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예상 독자가 한층 줄어드는 것이다. 보수적 관객까지 잡으려면 아주 평범한 설정에 그럭저럭 미남미녀가 지지고 볶으면서 지극히 평범한 동네 처녀 총각 행세를 해야 한다. 아니면 아예 쳐다보다가 고개가 부러지고 말, 재벌집의 선남선녀라도 괜찮다. 철저하게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서민을 위한 콘셉트를 펼치거나, 아예 욕하면서도 부러워하도록 휘황찬란해야 했다. 그래야 흥행 면에서 안전하다.
그런데 우락부락한 남자였다. 남성 당사자들로서는 이왕이면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하여 자신과 애절한 사랑을 하는 꿈이어야 하는데, 꽃미남이라도 절규할 판국에, 우락부락한 남자가 자꾸만 꿈에 등장했던 것이다.
문제의 남자, 그 초대 받지 않은 얼굴이 무단으로 여러 사람 꿈에 등장하여 그들의 속을 무던히 끓였겠다. 불청객 취급받고는 수많은 이들의 비난에 가까운 욕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남자로서도 뒷골이 당기고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초대 받지 못한 자는 슬플까? 아니면 이런 상황을 미처 짐작조차 하지 못해 슬플 수도 없을까? 오히려 억지로 꿈으로 끌려가니 피곤했을까? 그땐 미처 몰랐으니 피곤할 수도 없었을까?
1) 김아연, 「꿈에만 나타나는 ‘이 남자’를 찾습니다」, 동아일보, 2009-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