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외국어영역
고등학교 시절, 내포파라는 말은 마치 비밀 결사처럼 은밀하게 퍼져 있었다.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에 올인하는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때는 자립형 사립고나 특목고가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고, 일반고 중심의 입시 환경이 주를 이뤘다.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 역시 오늘날처럼 곳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절 입시는 일반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고, 내신을 잘 관리하지 못한 학생들은 결국 내포파에 들 수밖에 없었다.
내신 관리는 매우 치열했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등급이 급격히 떨어졌고, 특히 경쟁이 치열한 과목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외국어고와 같은 특목고의 학생들은 내신 15등급 평가에서도 상대적으로 불이익이 있었다. 외국어계열로 대학에 진학할 경우, 수능 성적을 기준으로 내신 등급이 책정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전국 3% 안에 드는 수능 성적을 받으면 외국어계열에서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수능에만 집중해도 외국어계열 진학에는 불리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내신 경쟁에 밀린 학생들은 차라리 수능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내신 10등급 바깥으로 밀려난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의 비외국어계열에 진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내포파라는 선택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대안이었다. 내포파에 들어간 학생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을 그저 방학처럼 보냈다. 시험지에 대충 답을 적거나 빈칸을 남기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들이 시험기간에 느끼는 여유는 내신을 관리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다소 놀랍고 때로는 부러움을 자아냈다.
중국어 시험은 내포파 사이에서 유명한 내기 과목이었다. 시험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가장 낮은 점수를 받는 것을 목표로 했던 그들만의 게임이었다. 그렇게 간혹 학생들끼리 '점수 덜 맞기' 내기를 벌였다. 예를 들어, 답을 일렬로 적어내거나 일부러 틀린 답을 적어내기도 했다. 한 번은 무려 28점을 받아 놀림을 받았던 적이 있다. 내기에 진 것이었다. 반면에 4점을 맞아 내기에서 이긴 친구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내신을 포기한 학생들은 시험기간을 흥미롭게 보내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생존 전략을 펼쳤다.
이러한 내포파의 존재는 내신을 철저히 관리하는 학생들에게는 일종의 바닥을 깔아주는 역할을 했다. 살신성인의 자세였다. 이러한 숭고한 희생을 누구도 고마워하지는 않았고, 누군가 알면은 혀를 쯧쯧 찰 일이었다. 괜찮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희생의 영역도 있는 법이다. 어쨌든 경쟁 사회에서 누군가는 바닥 점수를 맞아주어야 나머지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공정하게 최선을 다하여도 바닥을 깔아주었겠지만, 모를 일이다. 늘 이변은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 내포파의 행동은 비난보다는 암묵적인 이해를 받았다. 내신 관리를 철저히 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들 덕분에 조금이라도 등급을 올릴 기회가 생겼으니,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내포파의 삶이 마냥 자유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알고 있었다.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지 못하면 대학 진학이 힘들어질 것이 뻔했기에,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내포파의 학생들은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내심 수능이라는 최후의 시험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더욱 몰두했다. 그들은 시험지를 마주할 때마다, 내신에서의 실패를 수능으로 만회하려는 절박함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방식으로든 내포파는 존재한다. MZ세대들도 여전히 서울대를 원하고 연고대와 함께 명문대인 것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대학 가이드라인에서 소개하는 내용을 진리처럼 따라한다.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와는 다르게 논술 100% 전형이나 수능 위주의 다양한 전형이 생기면서 (전략은 다소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내신 관리의 압박을 벗어나고자 하는 학생들은 있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는 그들의 모습은 과거의 내포파와 닮아 있다.
결국, 내포파는 단순한 시험 전략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입시 제도의 틈새에서 생존하려는 학생들의 작은 몸부림이자,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