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행시
눈- 사람을
이- 틀 동안 만들었다. 만든 뒤 부수고 다시 만든 뒤 부수었다. 그러고는 하나를 그냥 놓아두었다.
가- 장자리에 자리 잡은 눈사람은 마당과 집 모두를 차지한 채로 여유롭게 마당 가장자리에 서서 자기의 전 재산을 구경하는, 이를테면 창조주를 관망하는 진짜 주인 같았다.
장- 독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오랜 관록마저 묻어난다. 겨우 세 시간밖에 안된 녀석의 눈빛 치고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침착했다.
먼- 지를 책장에서 닦아내며, 검어진 물티슈를 보다가, 밖의 눈사람을 보았다.
저- 눈사람, 언젠가 본 적이 있었을까? 문득 우리는 이미 만난 사이였고, 그걸 모른 채로, 아직 만나지도 못한 우리를 만난 사이로 만들기 위하여, 내가 그를 쌓아올렸을 때, 비로소 우리의 운명을 완성하게 될 것이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붓- 다는 기억에서조차 아련할 만큼 먼 곳으로 밀려나 있고,
는- 개가 어울리는 계절도 아니다.
다- 미는 거실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졸린 표정으로 하품하며, 발바닥을 핥으며.
☎ 박준, <눈이 가장 먼저 붓는다> 제목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