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양 Jan 11. 2022

[속초 한달살기] D4. 나는 늘 새로운 나로 살아간다

우리는 늘 자체적으로 만들어놓은 새로운 자아로 하루를 살아가곤 한다. 친한 친구와 대화를 할 때도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동료들과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상대하는 대상마다 조금씩 다른 자아들로 바꿔가면서 관계를 지속하겠지만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무언가를 숨긴 채 새로운 가면을 그 위에 덮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늘은 이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겉으로 보이는, 사회 구조 안에서의 모습과 편한 환경에서 편한 사람들에게 대하는 방식이  정반대인 사람들을 만난 게 이 깨달음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을 할 때에는 누구보다 전문적이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고객이 없는 상황에서는 듣기 거북한 말들을 주저없이 뱉어내는가 하면, 칭찬에 인색해 무뚝뚝하다는 말을 듣던 사람은 술에 취하자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이 생각했던 긍정적인 말들을 던져내기도 했다. 뭐 그러다가 또 새로운 자아로 돌아와 거침없이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나는 이 모든 현상들을 바라보며 '나는 어땠었는가?' 생각을 해보앗다. 과연 나는 얼마나 진정한 스스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 또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음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진짜 내 모습으로 사회를 살아가고자 할 때 나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지금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나의 본모습을 확인한 뒤에도 계속 내 곁에 남아있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꽤나 친근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고 거짓 없이 솔직하게 말을 하는 스타일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러 오기도 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싶다며 조언을 구하러 오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삶을 듣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하고 온전히 공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는데 내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을 하다 보니 굉장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인류를 정말 사랑하지만 인간 개개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나'라는 사람이 타인의 삶에 이입하는 걸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 책임을 다한다는 관점에서 사람들의 변화에 동참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꾸준히 나아가려고 노력을 해왔었는데 그것들이 나름의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이후엔 대화를 할 때는 한없이 진심이 되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쏟아내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공허한 경우들이 있었다.


이는 아무래도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타인에게 투자하는 관심의 크기보다 한참 작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과거에 내가 규정한 나의 모습들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다 보니 크고작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수년 전에 타인을 돕는 인생을 사는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터뷰를 하고, 남을 위해 글을 쓰기도 했으며,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뛰쳐나가 곁에 있어주기도 했다. 이것들이 반복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긍정적인 관계들을 맺고 나름의 인정을 받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깊은 의구심이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연락했던 사람들의 채팅리스트를 보며 내가 내 마음을 편하게 털어놓기 위해 먼저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아직까진 없는 것 같았고 이 사실이 의구심의 존재를 증명해주었다. 물론 그 사람들과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관계가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좋은 관계들이기 때문에 나의 어려움을 뱉어내기 부담스러운 쪽에 가깝다.


내 솔직한 모습을 타인이 봤을 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 아니면 그보다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내 이기심 등이 이 모든 것들의 기저에 깔려 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좋지만 깊고 개인적인 얘기를 나누기엔 아직도 불편한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섣불리 남이 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선을 그어버린 것일 수도 있는 이 경험, 모두가 한 번쯤 겪어보지 않았을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꺼내놨을 때 기존의 관계가 얼마나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목격한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하루는 지인이 꽤나 화가 난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자신이 공동체 내에서 소외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고.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고 자신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신경 쓰는데 그들은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그 옆에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꽤나 별로야. 내가 봤을 땐 그래.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는다면 스트레스만 받을 거야.” 이 말을 듣고 앞서 언급했던 사람은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며 다시 되받아쳤고 이 대화는 끝날 줄 모르고 반복됐다.


나는 대화를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며 그들이 내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다. 앞에선 누구보다 여리고 착하고 챙겨주는 것 같던 사람은 뒤에서 누군가를 평가하고 잣대를 들이밀며 격의 높낮이를 따지고 있었고, 모든 걸 괜찮다고 얘기하던 사람은 혼자 자신의 환경이 이렇고 저렇다 단정 지어버리고 착각에 빠져 끙끙 앓고 있었으니 말이다. 얕은 관계에서 관찰할 때 몰랐던 점들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그들이 진심을 다해 뱉어낸 말들이 내 가치관과는 꽤나 반대되는 언어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모든 것들이 불분명했지만 한 가지, 내가 다시 예전처럼 그들을 바라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였다. 이제 아마 조금은 다른 말투, 조금은 다른 표정으로 대화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한 뒤로 나는 진짜 자아와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격체가 공통적으로 맞물리는 부분들을 늘리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같다. 여러 자아간의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내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믿음의 깊이는 얕아지고 그 상황들이 이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것들이 거짓인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사실 이걸 이렇게 의식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옳은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거짓들로 치장한 내 모습에 적응해 궁극적으로 나까지 속이는 상황이 온다면 정말 최악의 결과를 맞이할 거라는 생각이기에 지금으로써는 최선의 선택이다.


도대체 언제 나의 진솔한 모습으로 세상의 문을 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 생이 끝날 때까지도 완벽히 솔직해지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렇다면 진솔하게 살아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솔직할 수 없다면 솔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무의미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완벽히 솔직해질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온전히 거짓인 것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의 정신은 어떤 외침을 부르짖고 있는지 적어도 그것들에 귀 기울일 줄은 알아야 살아가며 나 자신에게 더 신빙성 있는 믿음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린 완전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선적이지 않기 위해 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솔직함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얼마나 자세하게 알고 있는가? 혹시 누군가를 대할 때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괜스레 미소를 짓고 있지는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속초 한달살기] D.3 시간의 어제와 오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