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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 Jan 28. 2022

비워낼 용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간

[속초 한달살기] D. 22

조금은 희망적인 이야기. 뜨겁게 끓어오른 사막  아래 지하수와 여전히 시리도록 차가운 폭포수가 번갈아가며 컵에 담겼다 증발하기를 반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이후 찾을  있었던  다름 아닌 마음의 평화였다. 무한대의 가능성과 맞닿아 있는 나의 공허가 이제야 힘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어령 교수님은 우리 인간에 대해 설명하시다가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글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감정에 지배당한 나의 연약한 마음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성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려 서투른 선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워지지 않은 컵에 맛도 온도도 전부 다른 여러 가지의 액체들을 담아냈기에 컵에 담긴 나의 감정들은 뒤죽박죽 맛없는 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의 몸은 매 순간마다 원하는 감정이 상이하다. 어떤 때는 분노를 원하고, 어떤 때는 연약함을, 또 어떤 때는 사랑을 원하기도 한다. 그에 따른 첫 순서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감정들을 배급받곤 한다. 무의식의 감각 속에서 나는 이미 세상이 내치는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그것들이 뱉어내는 것들을 주워 담아 나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가끔가다 우리의 말을 잘못 이해하는 것처럼 무의식과 무지함은 단순히 체계화되어 있는 여러 상황들에 대해 멋대로 판단하고 나에게 감정을 쥐어주는데 우리는 그 감정을 밖으로 표출함으로써 시스템의 오류를 정당화한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나에게 분노와 불안이라는 감정들을 주입했다. 그것을 강제로 입에 쑤셔 넣어 어떻게든 배를 불리려고 만들었고 나름의 강제성에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수긍한 나는 불편한 기분이 몸을 감싸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감정은 음식처럼 들어오고 자연스럽게 배출되지 않았다. 개인의 주체적인 노력이 없다면 감정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해 제자리에 썩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부정의 굴레가 벗겨질 것이라 생각한 나는 다른 위치에서 긍정의 힘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문제는 여기서 더 크게 발생했다.


이미 꿈틀대는 부정의 감각들로 배를 불린 나의 시야는 전보다 한참 흐릿해졌다. 정확한 판단이 불가했고 극도의 포만감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무엇이든 잡으려 손을 뻗기도 했으며 둔해진 몸을 이끌고 비틀대며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중 낭떠러지 끝에 도착했고 죽음까지 반쯤 걸친 두 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온갖 혼란스러움이 가득해진 순간 나는 운이 좋게도 이 글을 만났고 깨달음은 순식간에 온 몸에 퍼졌다. 비우지 못한다면 새로운 것을 채울 수도 없다. 그리고 그 ‘비우기’란 나의 노력으로 인해 현실화된다.


그렇게 나는 내 몸 안에 뜨겁고 탁한 물들이 가득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높은 온도로 인해 내 몸이라는 유리컵은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부풀어올라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는 ‘정화’라는 명목 하에 깨끗해 보이는 여러 액체로 담긴 것들을 희석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감정들이 담길 수 없을 만큼 불어나 제멋대로 외부로 흘러가게 만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교수님의 글을 토대로 나의 성급함과 무리로 인해 벌어진 수용할 수 없는 감정의 부피를 지켜보며 나는 숨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세상과 맞닿아있는 공허, 죽음도 상처도 없는 그 순백의 공허가 날 선 나를 잠재워주기를 기다렸고, 아니나 다를까 이것은 온도를 미적지근하게 식혀주었고 탁한 오염물들을 바닥에 가라앉혀 깨끗한 물을 위로 이동시켰다.


비로소 감정을 분리수거할 수 있게 되었다. 가라앉은 노폐물을 내 안에서부터 걷어내 밖으로 버려버렸고, 남은 자리를 긍정의 힘으로 채워 넣었다. 이제야 알맞은 양의 감정이 잔잔하게 호수처럼 컵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평화를 되찾았다. 아직 유리컵은 자신의 단단함을 완벽히 되찾지 못했지만 담긴 마음의 온도는 적당했고 나에게 이롭기까지 했다.


무한한 공허함 위에 쓰인 마음의 부피, 정화와 더럽혀짐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우리는 차차 스스로의 마음을 걸러내는 방법을 배운다. 궁극적으로 우린 공허를 바라봐야 하겠지만 나는 이 글에 담긴 마음의 결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언어였기 때문일까.


당신의 컵에는 지금, 어떤 마음들이 담겨있는가? 그 마음은 어떤 온도를 하고 어떤 색을 띠고 있는가? 혹여 당신의 건강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가? 어쩌면 이미 웅크리고 있는 마음의 잔여물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의 힘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두렵지만 마주함으로써 다시 한번 고통과 손을 맞잡을 용기를 얻었다. 끓어오르는 마음이 흉을 낼 것처럼 위협한다면 바람을 불어 식혀라, 차가운 마음이 생명을 얼어붙게 만들 것 같다면 끌어안아 녹여주어라. 그리고 제 역할을 다 한 마음들에겐 작별 인사를 해 하늘로 날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라. 잊혀진 마음들과 채워질 마음들의 주인이 될 우리에겐 지금 비워낼 용기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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