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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 Feb 01. 2022

빗방울은 바위도 쪼갤 수 있다

좁은 틈의 가치를 알려준 할머니와의 첫 번째 만남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간판에 홀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온갖 장신구들과 조명들이 반짝이고 있는 좁은 공간은 아늑하면서도 향긋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잠시 앉아 새로운 세상을 만끽하기 위해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놓여있는 오래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 껍질이 벗겨진 나무다리를  의자는 오랜 경력만큼 앉는 사람을 편하게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같았다. 푹신한 천에 순식간에 잠에  뻔했지만 코를 타고 들어온 커피 향이 나를 깨어있게 했다.


  고운 커피를 들고 의자와 많은 세월을 함께 했을 것 같은 할머니 한 분이 느긋하게 내쪽으로 걸어오셨다. 한눈에 봐도 땅의 비옥함이 주는 지혜를 알고 있을 것 같은 분이었다. 그분은 사람이 없어 조용한 카페에 홀로 찾아와 준 손님을 정성으로 대접해주겠다 마음을 먹은 것처럼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내 앞에 커피를 놓아주었다.


  “어디서 왔는가?”

  지긋이 쳐다보시던 할머니는 나에게 물었다.

  “서울에서 왔습니다.”

  “속초에는 어쩐 일인가?”

  “하고 있는 일들이 이것저것 정리가 되지 않고 생각이 복잡해 마음을 비우려 왔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속초에 왔는데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야 하다 보니 여유는커녕 오히려 더 복잡해진 기분입니다.”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는 건 늘 불안하고 긴장되지. 그러나 그 순간들이 반복되면 잊지 못할 보석으로 빚어지는 걸세. 아직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음의 여유를 갖게나. 혹 마음이 복잡하다면 이곳에 와서 쉬도록 하게. 여긴 시간이 그 어느 곳보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흐르는 곳이니.”


  건네주시는 말씀에 푹 빠져 커피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할머니의 감사한 말씀이 끝난 후에야 나는 앞에 놓인 커피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고 그 맛은 다른 곳에서 마신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썼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달았다. 조화로운 맛을 입에 충분히 적신 뒤 나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제가 사는 곳에서 아주 작게 단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구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오니까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화하는 것 같아요. 모든 것에 확신이 사라지고 흐릿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에 대한 결과가 앞으로 더 이어지지 못할까 두렵기도 하고, 미래의 시간에 지금 쌓은 경험들이 빛을 내지 못할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왜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앞으로 빛을 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나?”

  “글을 쓰며 돈을 버는 건 언제나 그랬듯 너무나 어렵고… 제가 생각하는 단체를 앞으로 꾸려나갈 수 있을지 확신도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조급한가?”

  “네?”

  “조급하냐고 물었네.”

  “무슨 말씀이세요?”

  “자네의 얼굴을 보면 열정이 가득해. 이뤄내고자 하는 욕구가 들어찬 것도 보이고. 나름의 도전과 선택들을 꾸준히 해왔는데 이것들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고민이 되는 거겠지. 그리고 그 이어짐이 자신의 욕심을 채울 만큼 크게 변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을 테고.”

  “맞습니다. 저는 성공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제가 살아내고자 하는 방식의 지혜를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 스스로 모든 걸 책임지고 배워야만 해서 위기감이 상당히 컸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그 위기감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위기감이 공포가 되고 동시에 욕심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위기감으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시점이 왔는데 이뤄왔던 것들은 몸집이 커지니 더욱 욕심이 생기는 거죠. 그렇다 보니 현재는 앞으로 나아갈 힘의 주축을 잃은 상태에서 꿈만 크게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허공에 발길질을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한때는 나도 그런 딜레마에 빠진 적이 있었네. 확신이 서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데 움직이지 않는 걸 못 견뎌 무엇이든 빨리 처리하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쉽게 감정이 흔들려 포기하고 마는 그런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지. 아마 모두가 한 번쯤은 경험하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네. 당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니 배움이 있은 뒤에는 최선을 다해 변화를 만들어내야겠지.”

할머님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셨고 나는 내가 구축해온 가치관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는 더 깊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중요한 건 '무얼 하느냐'가 아니야. '무얼 바라는가'지. 자네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이란 뭔가? 돈이 될 수도 있고, 정신적 풍요로움이 될 수도 있고 그 둘 모두를 가진 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아마 자네는 여전히 그 가운데서 혼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직접적으로 누군가가 가르쳐줄 수 있지 않는 일을 해왔다고 했지? 그 안에서 자네는 자네만의 성공의 기준을 세웠을 거야. 가치를 앞에 두고 인류를 돕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추구하게 됐지. 그런데 주변에 보이는 것들은 그런 성공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성공의 철학들이 머리 안에서 정리되지 못하고 충돌하게 되는 거지. 홀로 길을 가자니 두렵고 남들과 같은 길을 가자니 지루할 것 같은, 그러면서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거지.

  체계는 한 번에 무너지지 않네. 바위처럼 단단한 돌에도 비가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면 조금씩 표면을 깎여나가고 나중에는 물이 고일만큼 구멍이 패이게 돼. 그렇게 조금씩 틈이 벌어지고 갈라지면 속에 크게 비어버린 공간을 만들고 어느 순간 경험하는 작은 충격에 둘로 갈라지고 말지. 인생도 마찬가지일세. 지금 하는 고민들이 ‘현재’ 때문에 발생하게 된 건 아닐 걸세. 아마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속앓이를 했던 매 순간순간들이 모여 모든 방황들을 한 번에 이끌어냈겠지. 그러니 강단있어 보이던 모습도 조용히 부는 산들바람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게 된 걸 테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차근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네. 과거의 시간들 속 내 발자국의 모습을 관찰해보면 내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조금은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니 말이야.”

  “정확하십니다. 부끄러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오만함 속에 빠져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하기에는 결과가 미지수이기에 섣불리 나아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주저하는 것은 삶을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져 불안해하는, 끊임없는 반복들 속에서 고통을 스스로 양산해내고 있는 꼴이죠.”

  “자네를 오늘 처음 봤지만 말이야..”

  할머니는 잠시 고민하시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자네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꽤나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네. 온갖 혼란과 혼돈 사이에서 방황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잊지 않는 몇 가지의 가치들이 꾸준하게 자네의 마음에 남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네. 인류애와 글, 사명과 책임.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인생은 언제나 두렵기 마련이지. 그런데 한 가지 말해줄 게 있네. 조금 전에 바위도 빗방울에 의해서 쪼개질 수 있다고 말했었던 거 기억하지? 방금 전에 말했으니 말이야. 이 이론은 성공과 성장에도 적용할 수 있다네. 자네를 빗방울로, 체계를 바위로 두고 처음부터 이야기를 이어가 보세.

  자네는 지금 단단하게 굳어있는 바위 앞에서 무력한 빗방울일 뿐이네. 그 위압감에 무척이나 기가 눌려있는 상태고. 자네는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고 판단하고 자꾸 무의식적으로 지는 결말을 상상하는데 이건 진짜 현실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반드시 피해야 하네. 대신에 자네는 시간에 따라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그 틈새를 봐야 해. 한 방울, 두 방울,, 조금씩 두드리다 보면 체계도 언젠가는 변화의 신호탄을 쏘기 마련이네. 한 번 깨어지기 시작한 돌은 끊임없이 갈라지고 또 갈라져 나중에는 전체를 바꿀 공간을 내어주네. 자네는 그걸 봐야 해. 지금 당장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아무 소용도 없는 것처럼 생각될 지라도 앞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하며 포기하면 안 돼.

  이렇게 작은 노력이라도 분명한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두드림을 통해 틈을 만들어낼 수 있네. 그리고 한 번 틈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그 안에는 더 많은 양의 빗방울이 쏟아져 들어올 수 있게 돼. 자네 혼자만의 싸움이 아닌 게 된다는 소리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철학을 위해 싸우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사회의 변화, 가치관의 발전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거라네. 이때가 되면 느낄 걸세.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삶을 살고자 했던 의지를 최선으로 생각했던 나의 책임감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구나’하고 말이야.

  수없이 많은 빗방울들이 바위틈을 타고 녹아들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면 결과적으로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옹벽을 무너뜨리게 되네. 새로운 발전을 위한 비료를 만들어내는 셈이지. 그렇게 되면 삶을 추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게 될 걸세.”

  “절대 변화시킬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단단한 바위를 빗방울인 내가 변화시킬 수 있다라..”

  “그렇지 끊임없이 두드리고 추락하다 보면 언젠가는.”

  하늘이 아닌 눈에서 빗방울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나에게 살아있다는 것의 가장 큰 가치가 어디 있었는지, 잊었던 기억들이 마음속에 색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달리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간신히 한 마디를 뱉어냈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오히려 너무 많이 쌓인 탓에 어떤 것부터 꺼내야 할지 주저하게 됐다. 감사했다. 무척이나.

  “감사하면 나중에 와서 또 이야기를 해주게. 요즘은 도통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 입이 심심하니 말이야. 이 나이쯤 되니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 자네가 느리게 가는 시간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면 나도 내 인생을 다시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네.”

  “물론이죠. 시간이 되실 때면 언제고 찾아뵙고 또 궁금한 걸 여쭤보겠습니다.”


  꽤나 갑작스러웠던 첫 만남을 마무리하는 인사를 나누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할머니는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 나를 저 멀리서 부르셨고 툭 던진 말이 도화선이 되어 마음에 불을 붙였다.


  “자네. 살고자 하는 삶을 살게. 주저하지 말고. 시간은 어떻게든 후회를 낳기 마련이지만 현재를 잃는 것보다 더 큰 후회는 없으니 말이야. 살고자 하는 삶이 있다면 꼭 붙들고 놓지 말게. 언젠가는 그 삶이 자네에게 악수를 청하는 날이 올 거야. 나는 알 수 있네. 또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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