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 오징어게임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 종말이 가까워진 것일까. 자본이 인간적 가치를 왜곡하는 자본주의의 절정을 오징어 게임을 통해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오징어 게임은 목숨과 돈을 맞바꾼 데스 게임이다. 한 사람 당 1억의 값어치가 매겨져 총 456명의 목숨값인 456억을 단 한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는 구조다. 456억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줄다리기를 할 때에는 강한 편에 속해야 하고, 구슬치기를 할 때는 구슬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도 해야 한다. 심지어 어둠 속에서 죽지 않기 위해 먼저 죽여야만 한다. 자본은 참가자들을 살려주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징어 게임은 자본이 사람을 죽이는 게임이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자유로운 선택”이다. 누군가의 강요도, 외압도 아닌 스스로의 자율적인 선택이 기초가 된다. 이를 보여주듯 오징어 게임에서 게임의 주최측은 한결같이 “참가자의 선택”을 부여한다. 딱지 치기를 할지 말지, 게임에 참여를 할지 말지, 게임을 계속해서 진행할지 말지 언뜻 보면 참가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보장되는 듯 보인다. 실제로 게임의 주최자가 나서서 강요를 한 부분은 없다. 다만 게임의 참여자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등 떠밀려 참여하게 되었다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201명의 생존자 중 187명 만이 돌아온 것을 보면 “자유로운 선택”이 허울만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오징어 게임 안보다 더 지옥 같은 현실에 몰린 사람들이 456분의 1이라는 희망을 품고 게임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징어 게임은 자본을 허락한 대신 인간적 가치를 앗아갔다. 극한에 내몰린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적 가치를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조상우는 이기기 위해 알리를 속이는 선택을 한다. 심지어 성기훈조차 인류애를 보였던 앞선 진행과 달리 오일남의 치매를 이용해 구슬을 얻는다. 그동안 꼼수나 어떤 반칙도 하지 않았던 성기훈은 결국 구슬 게임에서 이율배반적 선택을 한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선택을 부여하지만 결국 자본은 인간의 가치를 왜곡시킨다. 어떤 차별도 없는 동등한 기회의 부여를 말하지만 자본은 계급을 만들고, 계급은 차별을 만든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지만 이는 형식적 평등에 불과하다. 게임에서 볼 수 있듯이 선천적, 후천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형식적 평등은 불평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오징어 게임을 보며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주최측의 평등은 형식적 평등일 뿐이며 참가자들은 여전히 불평등에 놓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실제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오일남으로 대표되는 자본가(권력가)가 있다. 비인간적인 게임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 분명하다. 이와 달리 현실의 우리는 형체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자본주의 체제와 싸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에 중독되어 우리의 인간성마저 잃어가는 상황에 놓여있다. 결국 욕망을 원천으로 자본주의는 싸움을 지속시키고 그 안에 있는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끝나지 않는 싸움을 하게 된다. 456억을 획득한 성기훈도 결코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으며 다시 게임의 굴레로 돌아간다. 자본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