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겁게 살고 싶어

천진

by 윤전

중학교 때 즈음 재기 발랄한 나의 조크에 "키 크면 싱겁다더니" 라는 그 당시로도 진부해 보이는 말로 나를 그렇게 치부한 친구의 말에 김이 팍 샌 적이 있었다. 싱겁다는 말은 간이 덜된 뭔가 좀 모자란 느낌이랄까?


내가 왜 좋아?라며 뭔가 근사한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을 때 너의 순진무구함 때문이라는 말을 대학교 때 즈음 들었다. 나이 스물이 돼서 순진무구라? 그런 말을 또 한 번 더 들었을 땐 나도 그런가? 했다. 이번엔 천진난만.


"**씨는 안과 밖이 같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직장 선배에게 듣긴 했지만 나 또한 안과 밖은 달랐기에 의문을 가졌다. 한편 그게 남에게 보이는 나의 이미지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훨씬 더 봉사를 많이 하는 싹싹하기 짝이 없는 옆 동료가 "나도 안과 밖이 같아욧"하고 절규하긴 했다.


여튼 이런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며 '칼있으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 심각하고 근엄하게 살았다. 친한 선배에게 "나 대학 다닐 때 매일 기타 메고 다녔고 학교 체육행사 때 치어걸 한 적도 있어요"라고 말하면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과거의 모습과 내면을 가지고 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런 자기 자신을 아주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우리 속에는 어른의 자아와 함께 아이의 자아도 존재하고 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3이라는 숫자가 좋은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내면을 주로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와 세트로 부모의 자아가 하나 더 있긴 하다.


어른이지만 우리가 때로는 아이의 자아를 사용해서 말하고 행동할 수도 있다는 말을 장황하게 한 것이고 나의 유치함에 대한 변명이다.


이런 아이의 자아를 아무에게나 사용하면 좀 이상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겠지만 일생을 근엄하게 살아왔으니 이제 여생은 유치하게 살고 싶다. 나의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과. 때로는 나 혼자서.


나의 본성에 맞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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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

천불천탑으로 알려진 운주사 입구에는

여러 불상들이 풀숲에 놓여 있다

독창적인 모양새가 인상적인 이 불상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다 보니

흐릿한 눈과 코만 남아있고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에 남아있는 세월의 흔적을 조심스레 그리다 보니

어느새 불상이 웃고 있었다

석공의 마음도 나와 같았나 보다


웃고 있네......

웃고 싶다

저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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