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대필해 드립니다

by 염미정



‘편지 대필해 드립니다’


위 제목의 포스팅을 발견한 건

1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전 일이다.


나의 부모님은

상당히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분들이신데

두 분은 아직도 자주 티격대지만

이 면에선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나를 공무원으로 살게 하고자 애를 쓰셨지만,
노는 것을 좋아하고 유별난 성격의 내가

수험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자

사립 고등학교 행정실에 지원서를 넣게끔 지도해

나는 몇 년을 행누(행정실 누나)로 살았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학생들과 나이 차이도 거의 안 나고
캐주얼한 패션 스타일로 다니는 나를
학교 선생님들 중에 일부는 함부로 대하기도 했다.


아침까지 친하게 지내던 동료 실무원에게 뺨을 맞은 일

, 여름이면 선물로 들어온 수박을

10통이고 20통이고 썰어 나르는 일,

내 손과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던 변태 교장,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야'로 부르던

교양 없는 여선생,
남친에게 비밀로 하고 자기랑 여행 가자던

나와 키 똑같던 수학,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옆자리 언니 속눈썹 붙여주기.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더러운 일도 많았고,

나를 사랑해 준 사람 역시 아주 많았지만

이 일에 염증이 나기 시작해서

다른 도전을 하고 싶은 욕망만 매일 들끓었다.


하지만 학교에 근무하며

건실한 남교사를 만나 시집가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바람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편지'.


디지털 텍스트에 절대 담을 수 없는 것은

손 편지의 정성이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정성스러운 필체와,
delete가 아닌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워

고쳐나가 완성한 진심이 담긴 손 편지라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요망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책 읽기에 관심이 없고

디지털 도파민에 중독된 나에게

손 편지 쓰기란 거대한 옹성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잔꾀를 낸 것이 결국 편지 대필이었는데,

네이버 블로그에 ’편지 대필해드립니다‘

라는 제목의 포스팅이 게재된 것을 발견하곤,

눈을 반짝거리며 늦은 시간까지

블로그의 주인에게

나의 사정이 담긴 메일을 구구절절 써서 보냈다.


주인장은 국내 명문대에 재학 중인

나보다 한두 살 어린 남학생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살던 동네 출신이었다.


편지 쓰기를 즐긴다는 그는

대가도 받지 않고 나를 도와주었고,

진중한 말씨와 점잖은 태도를 가진 그의 지도를

나는 무한 신뢰했다.


몇 차례 교류 끝에 메일을 통해 편지 최종본을 받았고,

성공하면 한 턱 낸다는 식상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작업(?)은 끝이 났다.




대필 받은 편지를 알맹이 삼아 하루 일과표까지,

10장에 가까운 완성본을 예쁜 글씨로 눌러 담아

부모님께 제출했는데

그날 밤 부모님은 밤새 우셨다.


퇴사 허락은 말할 것도 없이.


탱탱볼같이 퉁겨나가길 잘하는 나답게

다음 도전의 끝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거의 내 스스로 이룬 최초의 성공이었고

너무 소중했다.




정신을 차려갈 즈음 글 잘 쓰는 청년이 생각나서,

명절 전후 연락해 만나 약소한 선물을 전하며

덕분에 직업도 생기고 결혼도 한다며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했는데

아이같이 기뻐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다시 한 번 행복했다.




이마저도 한참 전 일이네.

이러고 보니

나에게도 나름의 흥미로운 기록이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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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