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씨(2)

입석 칸에서 흘린 기억

by 염미정


영화 속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근 10년을 끊기듯 살던 남녀가 기차역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 하필이면 같은 열차를 타게 되는 일. 그리고 입석 칸에 서서 두 시간 반 동안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 그동안 기차 창밖의 풍경은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이상하게 우리는 자꾸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 로맨틱한 추억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8~9년 전쯤이었나. 나씨는 동남아시아로 취업을 했고, 나는 결혼을 했다. 그러고 나니 여느 이성 친구들이 그렇듯 우리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렇지만 가끔,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지, 하는 감상에 빠질 때가 있었다. 자매처럼 온갖 주접스럽고 짠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던 시절. 청춘의 한가운데로 잠깐 옮겨진 것 같은 순간이.


그중 하나가 섹시한 여 BJ와의 에피소드다.


택시를 타고 남자답게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나씨는 번쩍거리는 술집 매장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밤늦게 급히 단장하느라 구렛나루가 자꾸 뜬다며 씩씩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 너머로 저음 앰프를 쿵쿵 울리는 은빛 SLK200이 멈춰 섰다. 스포츠카 낮은 시트 밖으로 예쁜 다리를 내밀며 그녀가 인사한다. ‘벤츠…’ 전 재산이 20만 원뿐인 뚜벅이 취준생 두 눈에 삼각별이 크게 박힌다.


남자는 잠시 용기를 잃었다.


그녀의 압도적인 외모와 재력 앞에서 긴장한 나씨는 그 시간을 어떻게 흘려보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보기보다 소탈한 취향이었는지, 아니면 가난내 나는 취준생의 사정을 봐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여자가 먼저 포장마차에 가고 싶다고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두세 시간을 어버버 보내고 나니, 계산대 앞에도 그 여자가 먼저 서 있었단다. 그리고 나씨에게 건넨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지?”


어쩌지. 밤 12시에 야하게 입은 여자가 술을 마시자고 하면, 물어볼 것도 없이 백 퍼센트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구석구석 박박 씻었는데. 2차로 다른 술집이라도 가자고 해야 하나. 아, 진짜 안 되는데.


“응! 갈 수 있지!”


시꺼먼 머릿속은 아득히 복잡했지만, 그 여름 밤 불여시에 홀린 듯 남자의 대답은 곧장 저리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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