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밤, 도서관 불여시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지?”
밤 12시, 아직은 복작거리는 번화가 술집 골목에 벤츠 오픈카를 타고 나타났던 글래머러스한 그 BJ. 지방 국립대 출신인 그녀는 섹시한 외모에 비해 의외로 성실한 구석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몰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도서관에 나타나면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는 그녀의 열람실 좌석 번호까지 공유될 정도로 들썩였지만, 실제로 그녀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도도해 보이는 그녀는 은근히 도서관 남학생들에게 먼저 플러팅을 하는 반전을 보이기도 했다. 그것도 쪽지에 번호를 적어 전달하는 상당히 수줍은 방식으로 말이다. 조금도 남자가 궁하지 않았을 그녀가 왜 순진한 총각들 가슴에 모닥불을 지펴댔는지 알 길은 없으나, 문제는 그 불여시의 레이더망에 내 가장 친한 남사친 ‘나씨’가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쪽지를 받았다는 속보를 듣긴 했는데, 지지부진한 후속 보도가 궁금해지던 차 중앙도서관 복도에서 나씨를 마주쳤다. 나씨는 내가 더 질문하기도 전에 상기된 얼굴을 하고 지난 밤 그녀와 있었던 일을 방언 처럼 쏟아냈다.
“나씨!“
“볼일 보고 돌아왔는데 내 열람실 자리에 웬 단정하게 접힌 쪽지가 하나 놓여 있더라고. 내용은 지 친구가 내한테 관심 있는데 누군지 궁금하면 이 번호로 연락을 달라는 거데. 무슨 보이스피싱인가 싶었지. 근데 내도 남잔데 연락을 안 해볼 순 없잖아, 맞제? 내를 매도하지 마라, 니도 더 크면 알게 될 거다. 아무튼 연락하니까 지가 BJ OOO라는 거야. 그 가슴 크고, 다리 예쁘고, 목소리 좋은... 진짜 니가 OOO 맞냐고 물어보니까 지가 조금 있으면 방송 시작하는데 그때 사인을 보낸다더라고. 중간에 내 이름을 넣어서 인사해 준다면서. 그래서 내 평소에 인터넷 방송 보지도 않는데 어플 깔고 접속해 봤지. 그런데 진짜 내 이름을 불러주더라고 낸 아무 채팅도 안 쳤는데... 그렇게 예쁜 여자가 내한테 관심 있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가슴이 미친듯이 뛰더라. 내 심장 소리를 내 스스로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니까? 그러고 보니까 카톡이 하나 와 있대.
‘방송 12시에 끝나는데 그때 술 마실래?’
그 톡 보자마자 내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혹시 모르니까 존나 박박 깨끗하게 씻었지. 그러고 한 시간 거리를 택시 타고 쐈다니까? 내 전재산이 20만 원인데...“
나씨가 얼굴이 좀 크긴 해도 멀쩡하게 생겨서인지 가끔 맘에 든다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BJ가 연루된 그 짠내 나는 보이스피싱 피해(예정) 진술을 듣자마자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 앞의 나씨는 이미 눈이 풀린 채 그때의 흥분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저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열정에 찬물을 끼얹어야 할까, 아니면 그냥 같이 웃어줘야 할까. 내 머릿속 복잡한 계산기와는 상관없이, 나씨를 태운 택시는 그를 이미 파국일지 낙원일지 모를 그 밤거리로 데려다 놓은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