낼모레가 4월인데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얼굴은 봄을 느끼고 발은 겨울을 디딘 색다른 체험이었고,
이름 석자의 의미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화두를 돌아본 산행이었습니다.
능선 길 따라 아스라이 태백산맥 줄기 이어지고 삼척시와 동해바다 하늘에 닿아 가슴 시원하게 해 주었습니다.
봄과 눈
덕항산은 삼척시와 태백시에 걸쳐 있는 백두대간 줄기로서 북으로 청옥산과 두타산, 남으로는 함백산과 태백산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산 이름은 낯설지만 지하 금강산이라 불리는 동양 최대의 동굴인 환선굴과 대금굴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여 일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화전 일구고 살기에 적당하여 덕 주는 산이란 뜻의 덕메기산이라 불리다가 덕항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지요.
동쪽 삼척으로는 급경사를, 서쪽 태백으로는 비교적 완만한 구릉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덕항산 동쪽 사면
0610 4명이 양재에서 친구의 애마 카니발로 출발했습니다.
멀리 동쪽 끝에 있는 덕항산을 가니, 올라오면서 동강 백운산을 들려 1일 2산을 하자는데 의기투합했습니다.
중간 움직이는 시간이 만만치 않아 좀 일찍 모였고 산에서 어둠 만날까 염려하여 랜턴도 챙겼습니다.
근 한 달 만에 만난 친구들은 모두 건강해 보였고 떠들썩하니 즐거운 마음으로 강원도를 향했습니다.
이른 아침 도로는 온통 곰탕 설렁탕으로 앞이 잘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안갯속 도로
0930 최단 등산로 들머리인 태백시 외나무 골 예수원 입구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맑은 개울 마을 어귀 돌아나가고
한적한 시골길 옆 농가 몇 한가로이 누워있더군요.
푸근한 산줄기들 마을을 둘러 이어졌고,
파종 앞두고 부지런한 농부들이 일군
대지의 흙들이 기름져 보였습니다.
농부만큼 부지런한 산객들이 길가에 세워 놓은 차들도 몇 대 보였습니다.
들머리 마을
아직 얼어 있는 계곡 따라 포장도 10여 분 걷다 보면 좌측으로 아담한 예수원 건물이 나타납니다.
시내에서도 흔치 않은 돌담 옆 빨간 공중전화박스가 누군가의 사연을 기다리는 듯했습니다.
겨울나기 위해 쌓아 둔 장작더미며 정갈한 주변 경관에서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지더군요.
들머리 풍경
예수원은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 생활 공동체랍니다.
'노동과 기도의 삶'을 영위하며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 여부를 시험해 보는 실험실을 제공하기 위하여 1965년 설립되었다지요.
설립 당시엔 인적 끊긴 태백의 오지 중 오지였을 텐데, 이제 100대 명산이나 백두대간 최단 코스의 들머리가 되어 '운동과 목표'를 가진 산객들이 오가는 길목이 된 것을 구도자들은 어찌 여길까 궁금했습니다.
예수원 입구
'노동과 운동, 기도와 목표'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행복'이라는 인간의 최종 욕구를 추구하는 데에서는 결국 같은 구도의 길은 아닐까 유추해 봅니다.
'간구(懇求)'라는 단어와 함께,
'남아 일생을 어이타 연가처럼 헛되이 보내오리까'던 조용필 님의 '사나이 일생' 한 구절이 맴돌더군요.
그래서 '죽더라도 이름만은 남기 오리라'던 사나이 다짐과,
'온갖 화근이던 내 이름 석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던 어느 시인의 시구절이 오버랩되었습니다.
헛되이 살아서는 안 되겠지만,
죽어 이름을 남기려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집착이 아닐까라는 실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더군요.
노동과 기도의 예수원
본격적인 산길 접어드니 눈이 그대로 쌓여있습니다.
날이 포근해 얼어있지는 않았지만 발목이 빠질 정도로 깊더군요.
따듯한 봄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는데, 발아래 들려오는 뽀드드득뽀드드득 눈 밟는 소리와 폭신폭신한 감촉이 한없이 정겨웠습니다.
눈 덮인 등산로
산이 깊어질수록 눈도 깊어졌습니다.
언덕에 곧게 솟은 낙엽송 사이로 맑고 푸른 하늘이 그림처럼 빛나더군요.
아랫녁과 북사면 음지는 눈이 한창이지만, 위로 오를수록 따듯한 햇살 덕분에 오히려 뽀송뽀송한 낙엽 길이 이어졌습니다.
솔내음 그윽한 산길 사이로 며칠 전 강풍에 뿌리째 뽑혀 쓰러진 나무들 모습이 측은합니다.
끝까지 남아 산을 지키는 것은 등 굽은 나무라더니, 그래도 잘 자란 쭉쭉빵빵이 많은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이기도 하더군요.
산로의 나무들
그렇게 40분 정도 오르니 능선입니다.
덕항산 정상과 구부시령으로 갈라지는 백두대간 25구간 길을 만나더군요.
구부시령은 9명의 남편과 살아야 했던 기구한(혹은 행복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지요.
가끔 찬 바람이 넘어오기도 했지만 봄햇살 내리쬐는 대간길은 포근하고 아늑했습니다.
구부시령 이정표
여기서 정상도 멀지 않습니다.
능선에 펼쳐진 태백산맥 줄기 감상하며 백두대간길 따라 작은 언덕 하나 넘으니 도착합니다.
정상은 그저 대간 길이 지나는 한 부분으로 보였고 제대로 된 인증석 하나 없어 밋밋했지만, 낡은 표지판 뒤로 주름지어 이어지는 광활한 산맥들의 용트림과 멀리 삼척시 너머 하늘과 닿아있는 동해바다가 금시라도 파도쳐 밀려올듯한 웅장한 풍경을 빚어내고 있었습니다.
정상가는 길과 정상 풍경
백두대간길 따라 아득히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이어졌습니다.
멀리 까마득히 펼쳐진 깊은 계곡 사이로 희고 작은 도로 하나 뱀처럼 이어져나가더군요.
우측으로는 환선봉, 환선굴로 연결되는 갈림길이 보였습니다.
발아래 산속 깊은 땅 밑엔 환선굴이 환상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 떠올립니다.
이리 푸근한 육산 아래 그리 깊고 깊은 환선굴이며 대금굴이며 보물 같은 동굴들이 감춰져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수억 년 동안 물과 시간으로 자기 몸을 녹이며 빚어낸 신비를 산의 겉만 보고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이름을 남기려던 사내의 마음도 겉보기엔 멀쩡해도 혹여 그리 타들어가며 가슴속에 커다란 빈 공간 하나 만들어내지 않았을까요?
오래전 가보았던 굽이굽이 이어지던 환선굴의 감동을 끄집어 올리며,
역시 세상사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환선굴 가는 길
백두대간 벗어나 삼각 연 모양으로 원점 회귀하는 하산길도 순탄했습니다.
하산길
2차 향하는 주객(酒客)처럼
무사히 1산 즐기고
2산 향하는 설렘이
가벼운 발걸음과
친구들 콧노래와 어우러져
따듯하고 포근하여
'여인의 품' 같다는
덕항산 자락에
잔잔하게
흐뭇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친구와 함께
*2022년 3월 27일 다녀왔습니다. 따듯하고 맑은 봄날이었습니다.
*태백시 외나무길골~예수원~구부시령 갈림길~덕항산 정상~쉼터~예수원 원점회귀로 총 5.1km, 1시간 40분의 짧고 포근한 산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