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반생반추
늦게 찾아온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입추 말복 다 지났지만 아직 날이 더워
후덥지근한 기운이 방을 감싸고돈다.
한여름 고생한 선풍기가
안간힘을 쓰며 돌아가고 있다.
‘지나온 날들을 삶의 반으로 생각하자.
아무리 긴 시간이었어도
바꿀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이니,
그냥 그 정도로만.’
웨이브 잡힌 반백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Y는 생각에 잠긴다.
말끔한 모습으로 책상 위 컴퓨터 앞에 앉은
이지적 얼굴에서 비장함이 묻어난다.
기왕 다시 글을 쓰기로 했으니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나무 바구니에 안겨 창에 걸린 스킨 답서스는
매끈하고 풍성한 잎을 흘러내리고 있다.
새잎이 계속 돋아나 몇 개씩 새끼를 친
고무나무도 싱싱하고 찰진 윤기를 머금었다.
그 너머 방충망에 빗방울이 점점이 맺힌다.
골목의 붉은 벽돌과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전깃줄들이 고스란히 비바람을 맞고 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반이나 된다고 희망해보자,
적어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있으니까’
식어버린 맥심 한 모금으로 마른 목을 축인다.
‘반’을 생각하다 보니
‘주인에게는 벌써 반이 비었지만,
손님이 보기엔 아직 반이나 남았다
(To the host it’s half empty,
To the guest it’s half full.)‘는
시바스 리갈의 광고 카피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나이에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우기는 것은,
내 인생의 손님처럼 살아왔다는 고백인가?,
아니지,
남은 반을 소중히 쓰자는 다짐이지!’
Y는 강한 합리화를 한다.
컴 작업 시 늘 틀어놓는 유튜브 음악이
지금은 위스키 블루스로 바뀌어있다.
‘그래, 남은 반을 제대로 쓰기 위하여
지나온 반을 반추해보자.’
Y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뚜그렁뚜그렁 거칠어지는 빗소리와
부앙뿌앙 색소폰 소리,
크슈아크슈아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츄우우욱 비 내린 포도를 가로지르는 차 소리,
까르르까르르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지휘자 없이도 적절히 조화되고 있다.
‘내 기억의 끝은 어디일까?
지난 일들을,
지금부터 셈한다면
몇 살 때까지를 기억할 수 있을까?,
시작부터 따진다면
몇 살부터 기억할 수 있을까?’
항상 기승전결과 원인 결과가 맞아떨어져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 Y.
그의 성격 상, 삶을 곱씹어보는 것도
반드시 처음부터 제대로 해야만 했다.
남들이 보기엔
의미도 재미도 없을 힘든 작업을 시작한다.
Y는 비장함과 노곤함에 젖어
아득한 기억의 부스러기들을 따라간다.
문득 고백이나 독백보다는
대화가 낫지 않을까 하여 상황 설정을 한다.
금영 노래방의 노래 찾기 책을 보면
같은 제목이 가장 많은 노래가 ‘고백’이다.
50개는 족히 넘는다.
그런데도 그중 크게 히트하여
대중의 기억에 있는 노래는 별로 없다.
Y는 그 이유를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것이 고백이다.’
라고 설명하곤 했다.
어차피 보여주기 위한 글은 아니지만,
대화 형식을 빌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Y는 가상의 인물로 K와 M을 설정했다.
K는 대기업 퇴직 후 작은 회사를 운영하며
겸임교수를 하고 있는 49세의 돌싱이다.
그는 경험과 공부를 바탕으로
기업경영의 자문역도 맡는 등
1인 3역을 하며 살고 있다.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남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소인오락과 다양한 공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다.
M은 K가 가끔 자문을 해주는 중소기업의
45세 여성 임원이다.
역시 돌싱으로 미모와 실력이 뛰어나다.
30대로 보일 정도로 자기 관리에 충실하다.
회사 내에서 차기 ceo로도 촉망받지만,
사회적 성공보다는
안정적인 가정과 사랑을 갈망하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문학소녀로서 한때 작가를 꿈꾸었었다.
M과 K는 같은 동네에 거주하여
출퇴근 시간 자주 마주쳤다.
서로 관심사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비슷하여
말이 통한다는 것을 알고
자연스레 친해져가고 있는 중이다.
적당히 술을 즐기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K는 M의 분위기 있는 외모와 세련됨에,
M은 K의 자상함과 유머감각에 이끌렸다.
서로 호감을 갖던 그들은 휴가를 맞추어
의기투합했다.
‘서로를 알아가자’는 타이틀을 걸고
늦여름 바다로 모험 같은
2박 3일의 여행을 떠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