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여기부터, 큰 마당 소녀
철 지난 바닷가 횟집에서 K와 M은
오랜 친구처럼 연인처럼 잔을 나누고 있다.
그냥 파도치고
그냥 바람 불고
그냥 구름이 떠가는 풍경.
오후 2시가 갓 지난 실내엔 정적만이 흐른다.
쓸쓸하지만 편안하다.
낡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쏠 베이지의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 ‘가
취기를 돋운다.
-그 겨울이 지나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카트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열심히 사랑했지만 소득 없이
쏠 베이지의 무릎에서 죽어가던
페르퀸트의 회한에 찬 모습과,
혁명 때문인지 바람이 났는지
약속한 시간에 나오지 못한 애인을 기다리며
그저 카트리니행 기차에 앉아있어야만 하는
여인의 안타까운 모습이 겹쳐진다.
이미 소폭이 몇 순배 돌았다.
기분 좋게 풀린 몸과 마음은
가드 오프 상태이다.
풍성한 휜 색 원피스의 M.
긴 머리를 뒤로 묶은 그녀의
동양적이며 곱고 발그스름한 얼굴만이
빛을 내고 있다.
K를 바라보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당신은 누구냐고 어떻게 살아오셨냐고,
모든 것을 알고 싶으니 하나도 빠지지 말고
소상히 고하라고 재촉하고 있다.
함부로 자신의 속내를 말해 본 적이 없는 K는
속마음을 털어놓기 위해 취기가 필요했다.
소폭은 맛은 있지만
취하기도 전에 금방 배가 불러온다.
이럴 땐 소주 알 잔이 제격이었다.
수줍게 채워지는 투명한 술잔 너머로
빈 술병들이 흔들린다.
싱싱한 자연산 모둠회와 해삼 멍게
가자미구이로 채워진 술상이 입맛을 돋운다.
소주 한잔을 단숨에 털어 넣고
게르치 한 점을 씹는다.
고소하고 찰진 기운이 입안 가득 퍼진다.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누구는 엄마 뱃속도 생각난다 하는데
아마 과장일 거예요.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만 7세 전후부터이겠지요?
왜냐고요?
정확히는 밝혀진 바 없으나,
그 전에는 머릿속의 장기기억장치가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설득력 있어 보여요.
이사님은 어때요?"
둘은 많이 친해졌지만.
아직도 K는 M을 깍듯이 이사님으로,
M은 K를 선생님이라 호칭하고 있다.
"저는 6살까지는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근데 제게 질문은 하시지 말고
오늘은 계속 선생님 이야기만 해주세요."
M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말이라는 게 서로 장단이 맞아야 하는데,
저 혼자 지껄이라고요?
알았어요,
그럼 입에 침이 마르면 안 되니
바쁘지 않으시면 빈 잔이나 잘 채워주세요. "
"어머, 물론이지요,
어서 한잔 드시고 목축이세요,
선생님 어린 시절이 너무 궁금하네요.
그리고 저도 한잔 주세요."
곱게 눈을 훑긴 M은 잔을 그득히 채워주었고,
얼른 광어회와 고추 마늘 된장이 가득한
상추쌈을 싸서 부끄럽게 건네주었다.
"어이쿠 황공합니다. 이런 영광을 주시다니."
K는 상추쌈을 맛나게 씹으며
어느새 비어버린 M의 잔을 보았다.
소주 1/3 잔과 맥주 반 잔,
회오리 거품으로 맛을 낸 소폭을 전해주었다.
"제 기억의 올드 앤드를 돌이켜 볼까요?
아직 국민학교, 지금은 초등학교라 하지요,
입학 전이었어요.
확실한 것은 학교에 가기 전이었으니
만으로 예닐곱 살 정도였겠지요.
그 이전은 어땠을까요?
들은 바로는 충청도에서 태어났고
엄청난 개구쟁이였다는데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아요,
어른들 말씀으로는
지나가는 여성들의 치마를 작대기로 들치는
장난을 하다 혼났다는데 전혀 모르겠어요.
6세 이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린아이에게 해주는 젊은 부모들의 극성은
다 소용없는 거 아닐까요?"
"어머나, 어렸을 때부터 짓궂으셨네요.
지금 그랬으면 성추행 아닌가요? 호호호,
그리고 나중에 기억 못 하더라도
무조건 잘해주고 싶은 것이
특히 엄마 마음 아닐까요?
아이들은 어려서 예쁜 짓 한 것만으로
충분히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라던데요?
여하튼 젊은 부모들의 극성에 대한
선생님 말씀에 일부 공감해요.
선생님이 기억하는
인생의 첫 장면은 무엇인가요?"
잔을 부딪친 뒤 소폭 한 모금을 입에 가져가며
M이 거들었다.
K도 소주 반잔으로 입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일단 어린 시절의 끝을 기억하려면,
서울 창신동의 좁은 골목이 떠올라요.
가끔 꿈에도 나타나지요.
아직 개발이 안 된 곳이어서
늘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장소이기도 해요.
물론 아직도 그 상태는 아니겠지만.
빛바랜 나무로 만들어진 좁고 긴 한옥식 대문,
열고 닫을 때 경칩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문 가운데 동그란 쇠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어요.
기억은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과 후각으로도
강하게 남는 것 같아요,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황토 바닥 위에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고
퀴퀴한 냄새가 났어요.
오른편에 푸세식 변소가 있었지요.
화장실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곳이지요.
그곳을 지나면 우측으로 작은 마당에
나팔꽃 여럿이 담장을 오르고 있어요,
좌측엔 디딤돌과 마루가,
그 뒤론 큰방, 작은방이 연이어 있고요.
마당 끝에는 작은 쪽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열면 마치 다른 세상처럼
너른 마당과 큰 기와집이 나타났어요.
마당의 둥근 화단에는 접시꽃이며
베고니아, 채송화 같은 형형색색의 꽃들이
늘 만개해있었어요
더군다나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인
또래의 예쁜 여자아이가
늘 저를 나를 반겨주었으니
제겐 천국 같은 곳이었지요. 허허허,
엄마 아빠 흉내 내며 함께 소꿉놀이하자던
그 소녀는 지금 무엇을 할까요?"
"호호, 엄마 아빠 흉내 놀이는 모예요?"
"후후, 서로 여보당신하고 놀았던 거 같아요,
그러면 그녀가 기억 상 남아 있는
첫 여성이라고 해야 하나요?"
"참 조숙하셨네요, 크킄,
기억 속의 집 주변은 어떠셨어요?"
"집을 나와 오른쪽으로 경사로를 오르면
차들이 다니는 큰 길이 나왔어요.
교통사고가 자주 나던 곳이라
그곳은 금단의 영역이었지요.
왼쪽으로 가면 다닥다닥 붙은 집 몇 개를 지나
개천이 있었어요.
개천 건너 시장으로 통하는 길엔
철로 두 개 위에 얼기설기 판자를 덧댄
다리도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니 그 물이 흘러
청계천으로 합쳐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하얀 석회 벽과 타일 벽,
그 위로 철창에 가려진 남루한 창문 집들이
줄지어 있었어요.
그 밑으론 애들이 구슬치기며 딱지치기를
할 수 있는 작은 단층 계단이 있었고요."
"어머 선생님은 그런 디테일까지
다 생각이 나세요?
정말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아마 영화나 책의 첫 장면이나 첫 단어를
잘 기억하는 초두효과 때문 아닐까요?
기억의 첫 순간이니 말이지요,
첫 키스는 잊히지 않잖아요?"
"어머 참 선생님도, 얼른 한잔 더 하세요."
귓불이 빨개진 M이
얼른 술잔을 내밀며 화제를 돌렸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