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끝, 이야기의 시작 3

#인생은 각자도생

by 여의강

"자 그러면 장면들을 배경으로 한 사건 몇을

소개하고 올드 앤드를 정리해볼까요?"


"좋아요, 선생님"


조금 취기가 들어 보이는 M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며 K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 배경에서 큰 사건 몇 개가

선명하게 기억을 비집고 나와요.


첫 번째는 죽음을 경험한 물난리예요.

홍수가 나던 날이었어요.

개천이 범람하며 온갖 쓰레기에

동네 강아지까지 떠내려가고 있었어요.

집 마당에도 물이 들어차며

화장실마저 넘쳐났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와중에도 부모님 몰래 개천에 나가

물 구경하다가 긴 나무로 떠내려가던 것들을

낚시 삼아 툭툭 치며 놀았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미끄러져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순식간에 탁류에 쓸려 떠내려갔지요.

누군가 저를 건져냈고,

소식을 듣고 황급히 뛰어오시던

엄마의 사색이 된 모습이 보였지요.

그때 처음 죽음을 경험했고,

굉음을 내며 흐르던 물소리를 훗날

열하일기에서 박지원 선생이 물이 불어난

압록강을 건너며 남긴 글에서 떠올렸지요.

동네 개천에서 압록강을 느꼈으니,

어릴 적 보았던 것들은

참 거대하고 크게 느껴지는 것 같지 않아요?

다시 찾은 초등학교 교정에서 느끼는

초라하다는 감정이 그런 것이겠지요.

그 크던 어린 날의 형상이 훗날 다시 보면

왜 그리 작고 옹색하게 느껴질까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물에 빠져서 큰일 날 뻔하셨네요.

그때 건져주신 분은 생명의 은인이시네요."


"맞아요, 그때 엄마가 그분께

무척 고마워하시며 치하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저도 훗날 강에 빠져 죽을 뻔한

어린이를 구해준 적이 있어요.

불교의 윤회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그 아이의 어머니는

고맙단 말 한마디 없이 아이만 계속 혼내기에

저는 옆에서 굉장히 뻘쭘했어요."


"어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래도 선생님이 그때 살아나셔서

한 생명을 구하신 거네요.

잘하셨어요,

한잔 하시고 어서 다음 얘기해주세요, 호호호,

몇 개나 더 있나요?"


어린아이에게 상을 주듯이

M이 K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런 모습에서 귀염성이 묻어났다.

K가 나머지 반잔을 단숨에 비우자

M은 얼른 잔을 채워주었다.


"이제 두 개만 더할게요.

바다에 왔으니 빨리 끝내고

해변을 한번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좋겠네요,

우선 하시던 얘기마저 끝내시고요."


"두 번째는 약속과 기다림이지요.

아버님을 기다리던 기억과 연결돼요.

장난감 기차를 사주신다 약속하고 출근하신

아버님을 기다리며 이른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골목 어귀를 서성거렸지요.

평상시 어둔 골목길은

무섭고 두려운 곳이었는데

그날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아주 늦은 시간 술 냄새 풍기며 걸어오시던

아버님을 보며 정말 반가웠어요,

사실 아버님보다 손에 들린 기차를

펄쩍 뛰며 반겼지요.

늦도록 플라스틱 기차를 안고 잠에 들었는데,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조마조마하고

즐거운 기분을 처음 느낀 날이었어요.

그래서 약속만은 꼭 지키는 사람이 되고자

애쓰며 살았지요.

그런데 제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려요."


"어머 선생님이

무슨 못 지킨 약속들이 있으세요?"


의아해하는 M의 물음을 피하며

K는 쓸쓸한 웃음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약속은 참 소중한 것이지요.

그 얘기는 다음에 하고 오늘은 이제

마지막 기억으로 마무리를 할까요?"


"그러세요. 선생님, 어서 말씀해주세요."


K의 쓸쓸함을 모른 척하며 그녀가 재촉했다.

언제 비웠는지 모를 그녀의 소폭 잔을

새로 채우며 K가 말했다.


"자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차례네요.

그동안 관객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건배~"


"호호호, 건배~"


분위기를 돌린 K에 화답하며

M도 힘차게 잔을 부딪쳤다.


"마지막 기억은 나의 아픔과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이에요."


"아픔과 구름이라니

잘 안 어울리는 것 같네요?"


"맞아요. 안 어울린다는 것이 핵심이지요.

당시로서는 큰 사고가 있었어요.

집 앞 골목을 나와 시장으로 향하는 개천 위에

나무다리가 있다고 했지요?

그 근처가 저와 친구들의 주 나와바리였어요.

저는 그 나무다리 한 편의 철로에 서서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먼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미는 바람에

손 뺄 겨를도 없이 앞의 철로를 들이받았고

그대로 이마에 구멍이 났지요.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고

머릿속 하얀 뼈가 훤히 보였을 정도라고 해요.


그런 저를 들쳐 안고 병원으로 뛰던

누이의 근심 어린 얼굴과

울음소리가 겹쳐졌어요.

그런데도 남자는 울지 않는 것이란

아버님의 말씀이 떠올라

어린 저는 입술을 깨물었지요.

깨진 이마보다는

누이의 울음이 더 아프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누이의 품 너머로 파란 하늘과

하얗게 피어나는 뭉게구름이 보였어요.


저의 아픔과는 상관없이

그저 무심하게 흘러가는 풍경을 본 것이지요.

나는 아파 죽겠는데

하늘과 구름은 그리 모른 척 아름답다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가족 말곤 나의 아픔에는 아무 관심이 없구나 하는,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철학적 각성을 했지 몬가요.

모 인생은 독고다이요 각자도생이다

이런 거요, 하하하"


"어쩜 그 지경에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저는 그 나이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없는데,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조숙하셨다는

제 생각이 맞네요.


오늘 선생님을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평소엔 제 말만 들으시지

본인 이야기는 잘 안 하시잖아요?

정말 재미있네요,

다음 얘기는 언제 해주실래요?

이제 처음이니 혹시 시리즈를 구상하고 계시진 않나요?,

글로 써서 소설을 만드시면 어떨까요?

그러시다면 꼭 제게 제일 먼저 들려주세요, 꼭!"


술 때문인가 K의 유년 고백 때문인가,

기분이 업 된 M이 상기된 모습으로

다시 건배를 제의하며 계속 이야기를 청했다.


"시리즈? 그것 좋은 아이디어네요,

이리 말을 하고 나니

어수선했던 저의 초년 기억이 정리가 되네요.

또 이사님이 열심히 들어주고

장단까지 맞추어 주시니 힘도 나고요.

근데 독자가 이사님 한분일 테니까,

소설은 당치도 않고,

그냥 편하게 그 이후도 생각해보고

젤 먼저 말씀드릴게요."


"정말이지요? 저만 보는 소설?

그것도 근사하네요,

그러면 다음번엔 시리즈 주제 먼저 정리해서 들려주세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의 소제목은,

으음, 맞아요!,

'기억의 끝, 이야기의 시작'이라 하면 어떨까요?

선생님 우리 건배해요,

그리고 바다 보러 가요~"


K는 M의 작명에 감탄하며 잔을 들었다.







아침나절 내리던 비는 이미 그쳐 있다.

밝게 빛나는 푸른 하늘이 방으로 쏟아졌다.


유년의 기억 정리에 한나절이면 족한데

그동안 왜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Y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 방울 남은 커피 잔을 비우며

Y는 시리즈의 주제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질풍노도의 잉태' 끝,

'질풍노도의 태동'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