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바람을 뵈옵니다' 3

#야구 소년의 도전과 좌절

by 여의강

오랜 시간 해변에 머물던 K와 M은

각자의 방이 있는 호텔 숙소로 돌아왔다.


여독을 풀고 2차를 새롭게 시작하자는데

의기투합하여 둘은 온천으로 유명한

인근 대중사우나를 이용하기로 했다.

2시간 뒤 의관을 재정비하고

다시 만나 저녁을 하자하고.


K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M이 준 숙제를 생각했다.


‘시리즈라, 그래,

되는대로 말하기보다는 말머리를 잡아야

오히려 횡설수설하지 않을 수 있지.

되는대로 해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

비록 한 사람을 위한 글이라도 말이 돼야지.‘


온천을 끝내고 야외 욕장에서 몸을 말리며

K는 M에게 일러줄 주제들을 정리해보았다.

K의 어깨에 기대어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녀를 떠올리자

마음 한 구석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M이 화장기 없이 뽀얀 얼굴을 하고

프런트로 걸어왔다.

하늘색 원단에 흰 돛단배들이 떠가는

세련된 문양의 원피스,

약간은 굽이 높은 샌들 위에

아담한 발과 매끈한 종아리가 빛났다.

굵게 웨이브 진 머리를 자연스레 늘어뜨린

그녀의 미모가 돋보였다.

목걸이와 한 세트인 동그란 귀걸이가

걸음 따라 그네를 탄다.

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았고,

수수하지만 촌스럽지 않았다.


"잘 쉬셨어요?

온천을 했더니 살결이 뽀송뽀송해졌네요.

오늘 저녁은 특별히 제가 살 테니

선생님이 안내해주세요."


"별말씀을요,

이런 미인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영광인데,

당근 제가 모셔야지요.

근처에 문어숙회 잘하는 곳, 어떠세요?

분위기도 나쁘지 않고요.

술도 다 깼으니 다시 꺾어야겠지요?"


"호호호, 선생님은 빈말도 잘하시네요.

여기도 아시는 데가 있나 보네요?

저도 문어 좋아해요. 가시지요."


철 지나 한적한 부둣가에 식당들이 즐비했다.

어둠이 내린 바다가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네온 불빛이 바다 물결에 흔들리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문어 집 2층, 바깥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문어숙회와 소주 한 병, 맥주 두병을 주문했다.

"무슨 술로 드릴까요?"라 묻는 종업원에게

"테슬라요"라고 K가 답했다.

한때는 카스처럼(카스+처음처럼)이었는데,

요즘은 기분 따라 태슬라(태라+참이슬)를 마신다.

K는 마케터들의 조어 능력에 감탄했다.


K와 M의 만남은 거의 소폭으로 시작되었다.

짜릿하게 빈속을 자극하는 맛이

어색한 분위기를 털기에 제격이었다.

K는 마흔 넘은 남녀가 이렇게 가까워지기까지

소폭의 힘이 컸다고 생각했다.

잔을 만들며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떠올렸다.

전쟁의 우울함 속에서도,

만나면 우선 '칼바도스' 먼저 주문하던

주인공 외과의 라빅과 여배우 조앙의 이야기.

파리 출장 때 생젤리제 카페에서 54도나 되는

사과 브랜디인 그 술을 우선 마셨던 일도.


"선생님 여기 분위기 정말 좋은데요.

자 그럼 목을 축이셨으니,

시골 초등학생 이후를 풀어보실까요?"


기본 안주인 미역줄기를 안주삼아

K가 말아준 소폭 한 모금을 마신

M이 말문을 텄다.


“좋아요, 시작해볼까요."


시원하게 소폭 원샷 후

역시 미역줄기 하나를 씹으며 K가 말했다.


"서울 생활은 팍팍하게 시작되었어요.

동대문 버스 종점 근처에 위치한 학교였어요.

시골 학교에서 전학 온 저를 촌놈 취급하는

녀석들과는 쉬이 가까워지기가 힘들었지요.

여럿 친구를 사귀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야구였지요.

야구에서 저의 재능을 발견했어요.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잘했거든요.

내가 진짜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야구라고 확신했어요.

아마 제대로만 했으면

지금의 오타니만큼도 되었을걸요, 하하하“


“오타니가 누군데요? “


“만화처럼 야구를 잘하는 일본 선수예요.

지금 메이저리그의 LA 에인절스에서

투수이자 타자로 맹활약하고 있지요.

통상 프로 선수는 투타 중 하나만 해야 하는데

아주 드문 케이스이자 진정한 야구 선수지요.

선한 얼굴과 동양인 답지 않은 큰 체격,

그리고 깨끗한 매너도 일품이지요.

여하튼 야구에 미치다시피 한 저는

거의 매일을 운동장에서 살았어요.

야구라는 게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아무리 동네 야구라도 시합을 하려면

한편에 각 7명 이상은 돼야 하거든요.

그때 저의 역할이 선수 모으고, 장비 챙기고,

포지션 정해주고, 시합 매치시키고,

루울 정하고, 심판까지 보는 것이었어요.

거의 야구감독 수준이었지요.

저는 투수와 4번 타자를 겸했는데

친구들이 시합 외에는 공치는 것을 말렸어요.

왜냐하면 야구공이 귀하던 때였는데,

제가 치면 대부분 홈런으로

담장을 넘어가 공을 잃어버렸거든요. 크크크."


"정말요?

전 야구는 잘 모르지만 대단하셨네요.

소년 야구선수를 위하여 건배 어떠세요?"


M이 K의 잘난 척에 흥을 더했다.

원샷을 한 K는 쫄깃한 문어 두어 첨을

초장에 찍어 털어 넣었다.

입안에서 고소함과 소폭 향이 어우러졌다.

M의 칭찬에 고무된 K는 황금 비법으로

다시 소폭 두 잔을 정성껏 만들었다.

한잔을 M에게 건네주며 찡긋 윙크까지 전했다.


"야구 관련해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몇 있어요.

하나는 친구 S 이야기예요.

무지하게 빠른 제 공을 잘 받아낼 포수는

그 친구 밖에는 없었어요.

그 녀석은 집이 엄해서 밖에를 잘 못 나왔고,

나와도 곧 엄마가 찾으러 와서 늘 아쉬웠어요.

정말 공을 잘 받고 파이팅 뛰어난 친구였지요.

작년에 그 친구 소식을 듣게 된 거예요.

우연히 들른 초등학교 밴드에서였지요.

세상에나, 그 친구가 출가하여

어느 절의 주지스님이 되어있는 거예요.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속세를 떠나

수도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뜻밖이었지요.

그 친구가 늘 궁금했었기에

한번 찾아가 보려는 생각까지 했었어요.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에게는,

그때의 기억을 그냥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생기나 봐요.

각자에게 흐르는 시간에 더해지는 사건들이

다른 시간과 장소를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허긴 그 친구도 지금의 저를 보면

그리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맞아요,

저도 가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예전 모습을 찾기 힘들다 생각 한 적 많아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어떤 계기로 또 많이 변하기도 하나 봐요."


M이 누군가를 생각하며 끄덕였다.


"그런 심오한 말씀을?

이사님이 도인이시군요. 하하하,

또 하나는 5학년 가을이었을 거예요.


그 학교에 정식 야구부가 있었는데,

코치가 동네야구를 하는 저를 지켜보더니,

‘너 야구 정식으로 해볼 생각 없니?’하고

스카우트 제의를 한 거지요.

저는 순간 정신을 잃을 정도였어요.

늘 학교 로고가 새겨진

흰색 유니폼을 부러워했었거든요.

공부에 방해된다며 담임 선생님과

집에서는 엄청 반대를 하셨지만,

이미 가슴에 바람이 든

야구소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죽도록 좋아했던 것이 야구였으니까요.


야구부에 입단해 운동을 제대로 배웠어요.

또끼걸음, 오리걸음, 쪼그려 뛰기 등

하체 중심의 체력단련과 투타 연습으로

동네야구와는 차원이 다른 훈련이었지요.

아직 유니폼도 없는데

코치는 저를 친선경기에 출전시켜주었어요.

가능성을 보았던 거지요.

저도 거기서 활약을 해냈고요. “


”호호, 또 깨알 같은 자기 자랑이시네요?

그래서 지금도 하체가 튼튼해 보이세요.

그런데 왜 야구선수가 안되셨어요? “


”음~,

참 좋은 지적이고, 좋은 칭찬이시고.

좋은 질문입니다.

세상은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동계 합숙훈련에 들어가 한창 몸을 만들고

기술을 익히던 중 심하게 열이 올라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장티푸스라는 거예요.

잘 낫기만 하면 웬만한 감기몸살은 안 걸려

남한테는 안 준다는 그런 병이었어요.

근 한 달을 병원과 방구석에 누워

고열을 앓고 일어났지요.

당근 제일 먼저 야구부로 달려갔어요.

그동안 친구들 실력은 저만치 가있었고,

제 몸은 병을 앓기 전 같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제가 포기를 해야 했어요.

춘계 리그에 참여할 팀에

누를 끼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때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세상이 끝난 심정이었으니까요.

야구를 할 수 없다면

'야구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손글씨로 삽화까지 넣어,

야구를 좋아하지만 야구를 하지 못하는

천재 야구소년의 이야기를 연재로 만들어

친구들에게 돌려보게 했어요.

꽤 인기가 있었지요.

라디오 드라마와 독고탁 주연의 만화에서

상상력을 빌어왔던 것 같아요.


그러다 6학년이 되었는데

집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어요."


"어머, 무슨 일인데요?"


K는 상체를 숙이며 집중하려는

M에게서 일렁이는 밤바다를 보았다.

자신의 하찮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질문과 칭찬에 제안까지 해주는 M에게

애틋한 감정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검은 바다가 어느덧 지척에 와있었다.

소폭 몇 순배가 돌았지만,

K는 아직 정신이 또렷했다.


'마시기는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하는구나.'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