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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콘 Jan 08. 2019

그것 또한 내 세상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을 보고

영화를 보기 전에는 후기를 찾아보고 보는 경향이 있다. 후기나 평점을 보다가 보면 의도하지 않게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받을 때도 있지만, 후기를 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너무 큰 기대를 줄이기 위해서다. 영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실망이 크다. 책은 큰 기대를 하고 읽어도, 읽은 책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해도 크게 낙담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름 주어 가는 것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기대를 못 미쳐주면 굉장히 실망을 하게 된다. 짧다고 하면 짧을 수 있는 120분의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 감독들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려움 때문에 좋은 영화는 오래오래 기억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은 개봉하기 전부터 관심을 받았다. 연기라는 것에서 더는 흠을 잡을 곳이 없는 이병헌의 코믹 연기와 영화 <동주>에서 동주를 씹어먹는 연기력을 보여준 박정민의 출연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물론 나는 영화관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박정민이라는 배우 때문에 더 많은 기대를 갖게 된 영화였다. 영화가 상영된 후로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갈렸다. 출현한 배우들의 흠잡을 곳 없는 연기력만으로 돈이 아깝지 않다는 호평과 뻔한 한국형 신파극, 언제까지 장애인들을 웃음거리로 만들 것인가라는 혹평으로 파가 갈렸다. 연기력만 볼 것인가, 연기력과 스토리까지 볼 것인가에 대한 엄격함이 추가된 것은 아마도 너무나 훌륭한 연기력을 갖춘 두 배우를 가져다 썼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가늠해볼 뿐이다.


#난 나쁘지 않았다.


영화를 본 후 내게 평가를 내리라고 하면 나는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쪽으로 점수를 주고 싶다. 물론 혹평을 내린 사람들이 말하는 말들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측면에서 거슬리는 것은 딱히 없었다. 호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출현한 배우의 연기력으로 모든 것들을 물 흐르는 듯이 끌고 갔기 때문이다. 



1) 뻔한 신파극


사실 너무나 뻔한 스토리와 뻔한 신파극이었다. 한국형 가정 폭력에 집을 나간 어머니(윤여정)와 아버지의 폭력에 혼자 외롭게 자란 조하(이병헌)의 설정 자체로도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 물간 WBC 웰터급 복서 챔피언이라는 컨셉과 17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동생 진태(박정민)가 서번트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세상의 모든 불행은 다 가져다 놓은 설정들이 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 새로움을 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영화 자체에는 아프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조하는 사랑받지 못한 과거의 그늘에 갇혀있고, 인숙(윤여정)은 자식을 두고 도망친 과거와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아들을 혼자 키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진태는 서번트 증후군을 가지고 있고, 집주인인 홍마담(김성령)은 홀로 딸을 키우는 호빠집 사장님이다. 그리고 특별출현으로 나오는 한가율(한지민)은 잘 나가는 피아니스트였다가 사고로 다리를 잃고 잠적한 인물로 나온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다들 하나씩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서 행복을 찾고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모든 스토리가 너무나도 많이 나왔기에 새롭지 않아 보일 수는 있지만, 새롭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익숙하기 때문에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익숙하기 때문에 크게 느껴지는 반감이 없다. 어쩌면 혹평가들이 영화를 비판했던 이유는 영화를 통해서 삶의 회피처를 찾고 싶었지만, 너무도 현실 같은 익숙함에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2) 스토리의 떡밥도 흔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스토리의 떡밥들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수준의 떡밥들이었다. 진태가 서번트 증후군이지만 피아노를 잘 치니까 콩쿠르에 나가게 해 달라는 떡밥과 인숙이 자신은 아픈 곳이 없다고 말하는 떡밥과 비운의 피아니스트 한가율이 나오고 우연히 조하에게 교통사고를 낸 것 마저도, 모든 우연들과 인연들이 체계적으로 짜 맞춰가는 스토리들이 전혀 새롭지 않았다. 그리고 떡밥들이 해결되는 과정에서의 스토리 전개라던가, 인숙과 조하의 17년이 넘은 둘의 감정이 "내가 다음 생에는 너한테만 집중할게"라는 대화로 풀리는 모든 것들이 익숙한 눈물을 짜내게 만들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질릴만했다. 이것에 대해서 나는 딱히 옹호해 줄 이야깃거리가 없다.



3) 언제까지 장애인들을 희화화할 것인가


진태 역할을 연기한 박정민은 6개월 넘게 매일 6시간씩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물론 영화에서 사용된 피아노는 박정민이 직접 친 피아노가 아니었지만, 단지 연기만을 위해서 그는 6개월간 6시간의 노력을 피아노에 쏟았다. 한치의 오차도 드러내지 않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에 더불어 박정민은 진태 역을 위해 복지관으로 봉사활동을 갔다. 그들에게 연기를 지도받고,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디테일한 부분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박정민은 진태를 연기하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정민이 진태를 연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던 이유는 사람들에게 '제대로'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영화에 출연시키면 감동과 불편함에 대한 깨우침과 보통사람들과 다른 그들로 인한 웃음을 준다. 하지만 사람들이 웃음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이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통 사람인 자신들과 다르고 자신들과 다른 행동을 하기 때문에 재밌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으로 이뤄지지 않는 행동들과 사고 때문에 재밌지만 같이 살게 되면 힘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와 다르다고 그 사람들의 세상이 틀린 세상은 아니다. 우리와 다른 세상을 사는 그들을 보는 방법과 적응하는 방법 그리고 이해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는데 사람들은 영화에 나오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웃음거리라 생각하고 희화화한다고 판단한다. 영화적인 요소를 위해서는 웃음 포인트가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나는 그 모습을 통해서 그들도 웃을 수 있고, 그들도 자신의 세상을 자신들만의 해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편견이 어린 시선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왜 쇼팽이었을까?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클래식은 거의 듣지 않으며 유명한 클래식 명장들의 이름만 알지 그들의 음악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클래식 연주 장면이 나오면 한없이 감동한다. 음악이 주는 웅장함, 거친 환희, 잔잔한 살랑거림 등 걷잡을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쳐서 저절로 박수를 치고 감동의 눈물을 찔끔거린다. 


그럼 왜 영화에서는 쇼팽이었을까? 내가 쇼팽을 아는 이유는 만화 '피아노의 숲' 때문이다. 거기서 주인공은 쇼팽 콩쿠르에 나가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쇼팽은 조금 더 내게 익숙한 클래식의 명장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진태가 쇼팽의 곡을 치는 내내 가슴이 벅차올랐고, 왜 감독은 쇼팽을 골랐을까 생각했다. 쇼팽이 오직 피아노를 위한 곡만을 쳤기에, 피아노의 음색을 잘 살렸고 진태는 피아노를 쳐야 하는 서번트 증후군이기 때문에 쇼팽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굳이 내 생각을 첨가해 넣는다면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쇼팽은 피아노곡만 200곡 이상을 만들면서 피아노로 할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음악에 담아 넣었다. 여기서 나는 시인이라는 말에 집중한다. 시인은 언어의 유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많은 단어들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로 세상과 대화하는 사람인 것이다. 서번트 증후군인 진태가 자신만의 이야기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피아노였기 때문에 굳이 쇼팽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하찮은 의견을 던져본다.


#결국 그것 또한 내 세상이다.


영화의 제목은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삶이 과연 그것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의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선 <그것 또한 내 세상>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각자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각자의 세상은 모두가 다르고 합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각자와 각자가 만나서 관계를 지속하게 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내가 살던 삶과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 둘은 영원히 겹쳐지지 않을 수 있고, 평행을 이루면서 각자의 영역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내가 사는 세상인 것이다. 수없이 변화하는 삶 속에서 상처 입고 치유받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것, 그것만이 내 세상이 아니고 그것 또한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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