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콘 Jan 07. 2019

나는 가끔 눈을 감고 걸어본다.

영화 <버드 박스>를 보고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라면 먹고 갈래?" 보다 요즘은 "넷플릭스 보고 갈래?"("netflix and chill")란 말이 더 쓰인다는 요즘, 오랜만에 넷플릭스에서 역대급 영화를 발견했다. 바로 산드라 블록이 연기한 영화 <버드 박스>이다. 영화 <버드 박스>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여기저기 명언들을 살펴보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해라.'라고 하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 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공포감에 다른 무엇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점을 잘 표현했다.


산드라 블록이 연기한 맬러리는 조금은 삶에 회의를 느끼는 현실주의자이다.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다른 삶에는 관심이 없는 회의적인 여성으로 현실적이고 독립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영화는 맬러리와 여동생이 산부인과를 다녀오는 와중에 알 수 없는 공포와 마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맬러리의 동생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


전 세계적으로 이상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을 하면서 질서가 흩어졌다.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무언가'를 본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목숨을 끊기 위해서 노력한다. 여동생의 자살을 눈 앞에서 보게 된 맬러리는 가까스로 도움을 받아서 한 집에 모이게 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모든 창문을 가렸고,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생긴 유대감으로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집안에 있는 음식은 한정적이고 이들은 음식을 구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한다. 몇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고 난 후 이들은 보이지 않는 적에 대처할 '답'을 찾는다. 적을 마주하지 않아도 죽지 않는 법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모든 시야를 차단하는 것"이다. 


새는 어떤 '존재'를 감지한다.

여기서 "버드 박스"라는 제목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보통 새장은 Cage를 사용하지 Box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Cage안에 있는 새들은 자유롭게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만,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Box안에 갇히게 된다면 새는 살아는 있지만,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을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집안에서 모든 창문을 막고 사는 사람들이 박스 안에 사는 새와 무엇이 다를까?


#나는 가끔 눈을 감고 걷는다.


정말 특이한 습관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가끔 눈을 걷고 걷는다. 지하철역 환승 기간이 길 때나 길이 일직선으로 아무런 장애물이 없을 때 호승심에 눈을 감고 걸어본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걸어보았지만 10걸음도 못 가서 두려움에 걸음이 머뭇거리게 된다. 분명 내 앞에는 장애물이 없는데 처음 걸었던 힘찬 발걸음과 다르게 내딛는 발걸음이 약해지기 시작하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뒤덮는다. 


보이지 않으면 저렇게 걷는 것도 무섭다.

뇌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인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내가 걸을 수 있는 10걸음이 뇌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마지노선인 것이다. 그 이상이 넘어서면 뇌는 시각을 이용한 정보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맬러리가 눈을 감고 밖을 나설 때 느껴지는 공포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였을 때는 눈 앞에 나무도 위협이 되지 않지만, 눈을 가리는 순간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저 Box안에서 날아다니면서 벽에 부딪히는 새처럼, 눈을 가리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부딪히고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


#이름이 없는 슬픔


맬러니는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 한 명은 자신이 낳은 아이 '보이'와 다른 한 명은 자신에게 아이를 맡기고 죽은 '걸'이다. 보이와 걸은 이름이 아니다. 그저 단어일 뿐이다. 물건처럼 불려지는 사물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불리는 명칭이 존재하지만 자신을 나타내는 '이름'이 없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보면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나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 누구도 명백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맬러리는 살아는 있지만 삶이 지속적이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이름 같은 것'을 지어준다고 해보았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괜한 희망은 오히려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촉발제'가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서도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삶을 지속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희망'이고, 같은 시간을 버티는 '친구'들이 아닐까? 맬러리는 필사적으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면서 '희망'이라는 존재를 '이성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애썼다. 그녀에게 희망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궁금했다.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억제하고 현실적으로만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해결해 나가는 것과 언젠가는 다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도움이 될까? 여기서 중용이라는 단어가 필요한가 싶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적당히 두 방향에 마음을 두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볼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는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를 말하면서도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요구한다. 제대로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계속해서 연장하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이 힘든 삶을 끝내고 싶다면 밖으로 나가서 얼마든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된다. 볼 것인가 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에 대한 것은 바로 '보이' '걸'에게도 전해진다. 맬러리는 아이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단순한 명칭인 '보이''걸'이 된 것이다.


귀여운 손바닥 ㅠ

위기의 순간 맬러리는 아이들을 제대로 '인식'한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대한 마음이 잡히게 된 것이다. 제대로 볼 수는 없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의 아이들을 '인식'할 수 있다. 아이들을 제대로 마주 보면서 맬로리와 아이들의 관계는 끈끈하게 연결된다. 우리들은 많은 것을 보는 세상에 살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무엇을 볼 것이고 무엇을 볼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결국, 그들은 여전히 Box안에 있다.



맬러리와 아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시각장애인 학교다. 시각 장애인들은 보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살아가지만, 무엇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더 유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상황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도우면서 살고 있다. 영화 <버드 박스>에서 새는 미지의 생물체를 '감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안전하게 공동체로 들어간 맬러리와 아이들은 Box안에 갇혀있던 새들을 풀어준다. 새들은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가지만, 여전히 그들은 Box안에 있다. 시각 장애인 학교라는 곳 안에서 나갈 수 없고, 그 안에서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무엇을 볼 것인가를 알고 있다. 어둡고 상처만 생기던 Box가 생각보다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나 어장관리 당한 것 같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