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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콘 Feb 12. 2019

편견을 이겨낸 우정

영화 <그린북>을 보고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는 정치 드라마로 많은 팬을 사로잡았다. 정치계에서의 수 싸움과 배신과 협력 등이 오가고 무정하고 매정한 처사에 다들 혀를 두르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면 여러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나는 특히 레미 덴튼가 좋았다. 매정한 정치계에서도 자신의 기준을 지키며 정치적으로만 움직였고, 소신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는 배짱이 있었다. 또한, 은근 로맨티스트여서 굉장히 애정 하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크리스마스에 늘 집에서 영화 <반지의 제왕>을 몰아서 봤다. 애인도 없을 때는 연례행사처럼 영화 <반지의 제왕>을 돌려봐야 한다고 했다. 프로도의 답답함과 샘의 멍청할 정도의 우직함, 레골라스의 잘생긴 외모와 함께 아라곤의 거친 야생미를 봐야만 1년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각 영화마다 아끼는 배역들이 하나둘씩 있기 마련인데 내 기준에서는 역시나 아라곤이었다. 왜냐면 아라곤 역시 영화에 나오는 유일한 로맨티스트였기 때문이다.


아라곤과 레미 덴튼


그런데, 이번에 내가 애정 하는 두 명 레미 덴튼 역할을 했던 마허샬라 알리아라곤을 연기했던 비고 모텐슨이 같이 작품을 찍었다는 것이 아닌가. 두 배우가 촬영한 영화<그린북>은 극장가에서는 영화 <극한직업>에 밀려 상영관을 많이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상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1960년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과 백인의 우정을 그린 영화 <그린북>을 보기 위해서 (좋은 시간대가 없어서) 꽤나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우선 아라곤 형이 너무 늙었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거칠게 정돈되지 않은 긴 머리, 늘씬한 몸매에 검만 잡으면 치렁거리는 앞머리 사이로 강렬한 눈빛을 터트렸던 아라곤형은 어디 간 것인가. 영화 <반지의 제왕>이 상영되었던 2003년에 비하면 벌써 16년의 시간이 지났다. 영원한 젊음은 없다고 1958년생 즉, 58년 개띠 비고 모텐슨형은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형님, 아버지 너무 늦게 찾아서 죄송해요.) 


58년 개띠 우리 아빠와 똑같이 배가 나오고 늙어버린 모습으로 젊을 때의 잘생김은 찾아볼 수 없고, 동네 아저씨와 같은 후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 세월이여. 영화 초반에 비고 모텐슨 형의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꽤나 힘들었다. 


그렇다고 마허샬라 알리 역시 나이가 어린것만은 아니다. 1974년생인 알리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멋진 몸매와 핏을 전달해주었다. 아라곤 형의 충격을 슈트핏이 완벽한 마허샬라 알리로 회복했으니, 나중에 보게 되실 분들은 참고해주시길 바란다.


아라곤형 많이 늙었네요...


#편견은 경험을 통해서 쌓인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배운다. 아니 배워왔다. 같은 색의 인종이 아니어도 모두가 같은 인류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고, 생김새가 달라도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이와 같이 가르친다. 편견은 위험하고 성급한 판단도 위험하기 때문에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하고 차별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세상은 가르침과 다르다.


동물이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경계한다. 개들도 같은 품종, 다른 품종 거르지 않고 처음 만나면 경계하고 거리를 둔다. 하물며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나와 다른 사람을 보면 경계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가 다르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외롭게 만든다. 따돌리고 고통받게 만든다. 보통은 다수가 소수를 따돌린다. 누가 그 지역의 다수냐에 따라서 권위가 달라진다.


이런 편견은 학교의 가르침과 다르게 경험을 통해서 무의식에 쌓이게 된다.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경험하게 되면서 각자의 판단에 대한 기준에 정립되고 정립된 경험은 곧 생활 방식으로 바뀐다. 유연한 사고를 가지지 않는 이상 이미 정립된 틀을 깨부수는 것이 꽤나 어려운 일이다.


편견은 무서운 겁니다. 토니.


#영화 초반 토니 발레롱가의 편견


영화 초반 토니는 집에 수리하러 온 흑인들이 마신 컵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티 내지 않아도 그는 흑인과 백인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흑인들이 마신 컵을 만져서는 안 되는 병균이 묻은 듯이 조심스럽게 들어서 버린다. 그는 백인과 흑인은 어울릴 수 없다고 믿는 듯했다.


일하던 클럽이 수리 때문에 몇 달간 쉬게 되자, 토니는 일자리가 필요해졌다. 추천을 받아서 운전기사 면접을 보러 간 곳에는 괴상한 옷을 입고 우아한 척하는 흑인 돈 셜리 박사가 있었다. 높은 위치에 앉아서 토니를 내려다보는 셜리 박사는 토니에게 두 달간 자신과 함께 남부 지방 투어를 갈 수 있는지 물었다.


셜리 박사는 자신이 흑인이어서 같이 안 하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지만, 토니는 돈만 맞으면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편견은 돈이라는 강력한 매개체로 잊어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토니와 샬리 박사


#영화 중간에는 돈 셜리 박사의 편견이 보인다.


토니는 자유분방하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은 지키며 계약을 중요시하고 우아함이라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와 다르게 돈 셜리 박사는 우아하고 지조를 지킨다. 피아노를 칠 때마다 짓는 우아하지만 슬픈 웃음, 고풍스럽고 깔끔하게 입는 옷, 상류층이 쓰는 억양과 말투 그리고 자세들까지 어찌 보면 결벽증이 있는 듯해 보인다. 


돈 셜리 박사는 싸우고 있었다. 흑인이 받는 차별과 편견에 대해서 온 힘을 다해서 싸우고 버티고 있었다. 남들과 다른 길이기에 외로웠지만 누군가에게 맘을 풀어놓을 수도 없었다. 흑인이지만 백인보다 더 백인처럼 행동해야 했고, 간디의 비폭력 운동처럼 자신의 지조를 끝까지 지키면 무언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돈 셜리 박사는 혼자 노력했기 때문에 어느 곳에도 낄 수 없었다. 백인들의 틈에도 낄 수 없었고, 흑인들의 틈에도 낄 수가 없었다. 백인들은 자신을 그저 피아노 잘 치는 흑인일 뿐, 결국 같아질 수 없었다.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지만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돈 셜리 박사 역시 자신의 편견에 갇혔구나 생각했다. 경찰에 잡혀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빗속에서 울부짖는 돈 셜리 박사의 표정을 통해, 제대로 된 화장실을 대접받지 못하고, 공연은 가능하지만 식사는 불가능한 식당의 부당한 대우를 통해서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흑인들의 눈물이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토니와 샬리 박사


#서로 다른 이들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백인이지만 흑인처럼 사는 토니와 흑인이지만 백인처럼 사는 돈 셜리 박사는 조금씩 서로를 향한 마음을 트게 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배척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따스한 감동을 받았다. 우정에는 국경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사실 국경 없는 우정은 이뤄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니와 셜리 박사는 조금씩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었고,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두 바보들은 말없이 친해졌다. 


토니와 샬리 박사


#마지막 편견은 지켜보는 관객이다.


영화 참 잔인하다. 마지막 편견의 몫은 관객에게 주었다. 눈이 엄청 오는 날 경찰차가 또다시 토니와 셜리 박사에게 다가온다. 이전에 경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을 기억한 관객들은 또다시 같은 상황을 상상한다. 저 경찰이 뒷좌석에 앉은 셜리 박사를 보고 부당한 처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감독은 잔인하게도 관객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들게 만든다. 배드 캅, 굿 캅이라고 두 번째 경찰은 좋은 경찰이었다. 타이어가 펑크 난 것을 알려주고, 타이어를 교체하는 동안 길목을 지키면서 안전한 통행을 유지한다. 순간적으로 착한 경찰에 안도하면서도, 보는 입장에서 편견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경찰에 대한 편견을 가진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토니와 샬리박사


#좋았지만 조금은 아쉽다.


영화는 잔잔하게 감동적이고 재밌었다. 하지만 조금은 아쉬웠다. 실화 바탕의 영화는 늘 조금씩 아쉽다. 너무 많은 픽션을 넣으면 주인공이 너무 신화적으로 표현되어 사람들이 잘못된 정보를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실화 바탕으로만 영화를 만들면 극적인 순간에 극적인 표현을 주는 것이 어렵다. 또한, 실화 바탕은 전달해야 할 내용이 많다. 메시지보다는 실화에 기반한 스토리를 많이 담아야 하기 때문에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더욱 임팩트 있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존재한다.


영화 <그린북> 역시 그랬다. 다 좋았는데, 영화라는 요소의 드라마틱한 부분이 조금은 아쉬웠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극적인 순간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이런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따뜻하고 마지막에는 찔끔 눈물이 나는 감동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화 <그린북> 촬영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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