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하나 엉글어진 것 같지 않은 지금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하는 나날들 사이에 슬쩍 가을이 발을 내밀었다. 이례 없는 여름의 날씨에 모두가 이 더위가 언제쯤 끝날까 목이 타는 기다림 속에도 시간은 조금씩 제 걸음을 걸어간다. 푸르른 여름과 쩌렁쩌렁한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끝이 나고 산들이 붉은 노을을 보여주는 계절이 오고야 말았다. 이 더위가 언제 끝나냐 했던 한탄들이 조만간 이 추위는 언제 끝 날까로 변할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입추가 된다고 해서 계절이 바로 변하지는 않는다. 모든 변하는 것은 슬쩍 스며들면서 변하는 것이지 갑작스럽게 변하는 것은 없다. 그런 가장 기본적인 이치를 계절은 몸으로 직접 알려주고 있다. 가을의 입구라고 해석할 수 있는 입추의 정의는 무엇일까? 궁금해서 찾아본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정의하는 입추는 아래와 같았다.
"태양의 황도(黃道) 상의 위치로 정한 24절기 중 열세 번째 절기. 양력으로는 8월 8일 무렵이고, 음력으로는 7월인데, 태양의 황경(黃經)이 135도에 있을 때이다. 대서(大暑)와 처서(處暑)의 사이에 들어 있으며,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이다.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
양력으로 8월 8일 오늘 글을 쓰는 이 시점이지만, 올해의 입추는 8월 7일 어제였다고 한다. 계절의 절기를 딱딱 맞추는 옛 성인들의 지혜가 놀랍기도 하면서, 자연의 일정한 변화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이라고 벼가 무르익고 열매가 맺히는 시기가 다가오는데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직 날이 쌀쌀한 시절에 심었던 벼들도 무르익어서 고개를 숙이고, 나무에 매달린 열매들도 제 결실을 내보이는데 나는 얼마나 무르익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올 한 해의 결산이 다가온다. 시간은 정처 없이 흐르기 때문에 금방 반팔이 긴팔이 되고, 외투를 하나씩 껴입을 것이다. 그렇게 한 해가 금세 지나갈 것이고 올 한 해를 되돌아보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 나는 무엇을 되돌아봐야 할까. 올해 내가 결실을 맺고 무르익게 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크게 없다는 생각에 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벼처럼 무르익어서 숙이는 고개가 아니고 죄스러움에 숙이는 반성의 자세라 할 수 있다. 무의미한 시간에 남들에게 나 이런 걸 했어요 할만한 것도 없다. 그저, 저 작년처럼 살았어요.라는 말도 당당하게 하지 못할 듯하다.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여서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늘이 열일하는 시기이고 뭉게뭉게 구름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애태운다. 이 시기에는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조정이나 고을에서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리면서 맑은 하늘을 기원했다고 한다. 하늘이 안 좋으면 기청제라도 올리는데, 사람이 의욕을 잃으면 어떤 짓을 해야만 할까? 먹먹한 고민이 먹구름처럼 눈 앞을 가린다. 무엇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는 한해였지만, 또 무엇하나 시작하지 않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부족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했고, 여행을 다녀와서 좋은 경험을 했으며 좋은 추억을 쌓았다. 이 정도면 뭐 '누구나 가능한 일이지'란 생각이 들 것 같다. 그리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도전을 선택했다. 지금의 직업을 놔두고 새로운 경험을 쌓으려고 한다는 큰 결정을 내렸다.
사실, 농사나 과일은 한 철이지만, 사람 농사는 한 철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야 나라는 씨앗에 제대로 된 거름을 주고 강한 마음을 뿌려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몇 년 후에 이 글을 다시 읽을 때의 내가 옳은 생각을 했는지, 잘못된 생각을 했는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그때쯤이면 무언가 무르익어있지 않을까? 입추가 지나고 본격적인 수확의 시기가 오면 모두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땀방울이 송골송골하게 맺히면서 시원한 바람의 기쁨을 알게 될 것이다. 잠깐 허리를 피면서 쉴 수 있지만, 꿈을 쫓아가는 모든 이들의 이마에 노력의 땀방울이 맺힌다면, 그 또한 실패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