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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내댁 Jan 09. 2019

영어에 대한 단상


때는 바야흐로 열 살,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엄마의 성화에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과외, 학원, 윤선생 학습지 등 1990년대에 유행했던 영어 학습법은 모조리 거쳤다. 돈은 배신하지 않는다더니 학창 시절 영어 시험만은 거의 만점을 유지했다. 반에서 영어 잘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늘 영어 교과서 본문 읽기 담당이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쭉쭉 본문을 읽어 내려갔다.


문득 선생님은 “호주가 영어로 뭐니?” 란 질문을 하셨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오스트뤠~일리아요”라고 답했고 다시 “편의점은 영어로 뭘까” 란 질문에 막힘없이 “컨비니언스 스토어요” 란 즉답을 했다. 서른이 넘은 지금, 아직도 기억나는 선생님의 만족스러운 얼굴. 짤막한 유년시절의 기억이다.  


친척집 방문 겸, 방학을 이용해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고 대학시절 아주 짧게 현지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레스토랑 캐셔로 아르바이트를 했더니 떠듬떠듬 어느 정도 기본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설픈 실력으로 운 좋게 외국계에 취업하게 되었고 이직도 하고 영어가 조금은 모자라지만 별 탈 없는 회사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한동안 너무 순탄했는지 3년 전 인생에 큰 사건 중에 하나가 일어났다. 나의 매니저는 한국인 팀장님이지만, 그 팀장님의 매니저는 아시아 본부 소속인 외국인이었다. 매년 각 나라를 방문 하진 않고, 나라를 대표하는 팀장 레벨들을 모아 다른 나라에서 1년에 한 번씩 회의를 하곤 했다. 새로운 매니저가 취임하기도 했고, 아주 오랫동안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겸사겸사 한국에 오게 되었다. 미팅도 하고 1:1로 상담 세션도 하고 귀국하기 전날 다 같이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영어에 자신 없는 팀원과 맨 구석자리에 앉게 되었다. 막내인 내가 나설 자리도 아니고 팀장님과 영어 잘하는 팀원들이 많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날따라 옆자리 영어를 매우 잘하는 팀원이 내 의자를 당기면서, “영어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한마디도 안 해요~ 호호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수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멘트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집에 가는 내내 하염없이 주룩주룩 울면서 귀가했다. 슬프게도 그날 이후로 나는 영어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이젠 다른 부서로 가버린 그 팀원을 탓하고 싶지 않지만, 영어로 말을 꺼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날의 우스웠던 내가 생각나고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눈물이 앞을 가려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외국계를 다니고 있고 앞으로도 다녀야 하지만 아직 까지 치료되지 않은 아주 아픈 기억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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