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필요했던 순간들
'왜 시를 읽느냐'라고 묻는다면, '시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을 해야겠다. 글을 읽는다는 걸 언제나 버거운 숙제처럼 여기게 된 건 문학을 공부하길 선택하고 나서부터였다. 사람의 말과 글, 그리고 그 안에 녹아있는 마음을 더 면밀하게 느끼고 이해하고, 곁에 두고자 했는데 대학에 온 이후엔 글을 마주하기가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글이 간절히 필요했던 순간들이 더 생생하다. 물론 글에 대해선 언제나 해소되지 않는 동경과 갈증이 있지만, 지금 말하는 순간들은 너무나 글에 목이 말라 필요한 단어들과 문장들을 찾아다 허겁지겁 몸에 담지 않으면 배기지 못하겠던 그런 때이다. 그럴 때면 난 다른 것보다도 '시'를 찾게 됐다.
돌이켜 기억해보면 내게 시가 필요했던 건 두 가지 경우였다. 첫 번째 경우는 ‘시’를 읽는 까닭보단 ‘한국의 시’를 읽는 까닭에 가까운데, 순전히 나의 전공 탓이다. 외국 문학 번역서를 주로 읽게 되기에 이반, 베라, 센나야 광장, 트베르스카야 거리, 이런 낯선 이름들, 누군가의 번역을 거친 말들에서 벗어나 날 것의 우리말을 읽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같은 이름이어도, 'Наташа(Natasha)'와 '나타샤'가 다르듯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와 백석의 시에서의 '나타샤'는 다르지 않나. 아무것도 거치지 않은 우리말,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고 한국인이기에 가장 잘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시'를 읽고 싶었던 것 같다.
두 번째는 이야기가 필요할 때였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갑작스레 부닥쳤을 때, 혹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더라도 매일의 삶의 무게가 부담이 될 때, 나의 지겨운 이야기에서 벗어나 남의 이야기에 푹 빠지고 싶었다. 영상이나 음악은 곱씹을 새도 없이 휙휙 지나가 금세 다른 장면이 등장하기에 이야기는 나의 박자대로 감상할 수 있는 글의 형태여야 했고, 또 '시'어야만 했다. 시에도 다양한 맛이 있겠지만, 그게 슴슴하든, 씁쓸하든, 달큰하든 간에 난 시는 어쨌든 소설보다 자극적인 구석을 가진다는 인상이 있다. 비유하자면 소설은 알약, 시는 주사 같은 거다. 길이 상의 문제일지는 몰라도, 시에 비해 소설은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기까지 뭉근한 시간이 지나야 한다. 나는 당장에라도 다른 삶에 빠져들어 나의 현실을 떨쳐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를 읽었다.
지난겨울 읽었던 김화영 교수님의 에세이에는 ‘문학은 삶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시는 삶에 형태를 부여한다. 내가 경험적으로 느끼고는 있지만 명확히 인지, 언어화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있다. 시에서 얻은 표현과 감상은 그러한 무형의 감각을 다시 한번 '앎'의 과정, 재의미화의 과정을 거쳐 나의 언어로 만들어 형태가 있는 경험이 되게끔 한다.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던 세상의 영역에도 눈길이 닿게 해 새로운 부분을 구축하기도 한다. 또한 시의 섬세함은 - 단어, 표현, 조사, 구두점, 행과 연의 구분 등등 - 경험 속 감각을 세세하게 분절해 형태가 부여된 삶에 다시금 변주를 가한다. 별거 아닌 듯한 나의 일상도 때론 지탱하기에 너무 버겁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에 시가 필요할 때가 있다. 시를 읽어도 나는 그대로 나이지만, 시를 읽으면 어쩐지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시를 읽는다.
* 수업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