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요? 재수해서 전문대 가는 인간 처음 보세요?
용건 없으면 가던 길 가세요
알 바야 쓰레빠야 짜샤
목전에서 한양대를 놓쳤는데, 제정신인 인간이 있을까. 있다면 그게 진짜 정신병자 아닐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름은 정신병자 아닌 정신병자였다. 그냥 냥대를 코앞에서 놓치고 정신을 놓아 버린 여자가 됐다는 뜻이다.
여기서 선택지는 두 가지.
그냥 고졸딱지단개폭망폐인이 되어 한양대한양대 하며 운다 VS 서성한 이상을 노려 삼수를 한다
그리고 여름은 생각한다.
나 진짜 대단한 불속성 효녀구나. 또 부모님 등골을 쪽쪽 빨아야 한다고? 또 수능 공부를 해야 한다고? 작년 10월 달이 이렇게 내 머릿속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제 존나 어떡하지? 진짜 어떡하냐. 아 그냥 죽어 버릴까.
불행 중 다행인지,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도 탈출구는 있다.
그건 바로 죽자사자 달려든 글쓰기로 끝까지 물고 늘어지기.
일단 정시를 쳤잖아? 그럼 정시 전형이 남은 거고. 그럼 평가원에 바친 값은 뽑아야지. 정신차려. 야. 정신차리고 또 글 써.
그렇게 여름은 술만 빨다가 문예창작과 정시 전형 정보를 이잡듯 뒤지기 시작한다.
문예창작 학원, 문예창작 과외, 문예창작 커뮤니티, 문예창작과가 있는 학교들 정시 경쟁률, 기타 등등..
그렇게 술만 빨던 여름은 어찌저찌 과외 선생을 구한다.
서울 예대 출신 문예 창작과 과외 전문 선생이랬다.
어제까지 논설문을 쓰던 나, 1지망 학교의 예비 1번떨을 겪고 갑자기 3인칭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하다? 이런 라이트 노벨(이하 라노벨)스러운 하루하루를 살기 시작한다.
- 여름 학생, 00일 00시까지 글 써서 제출할 수 있어요?
-네.
-그럼 00일에 또 봐요.
-네.
줌 강의가 시작됐다.
문창과에만 매달리며 산 건지, 선생은 한양대에 논술 전형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심지어는 한양여대떨이냐며 몇 번 묻기도 했다.
1인칭 소설 쓰기도 잘 안 해 봤는데, 3인칭 소설을 쓰라니. 게다가 이론부터가 존나 너무 어렵다.
그래도 여름은 소처럼 글을 쓰던 습관을 내장해 둔 덕에 선생이 시킨 과제를 재깍재깍 해냈고(어차피 당시엔 과외 과제 말곤 할 일이 없기도 했다. 무엇보다 삼수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고 한다), 논술 수업으로 익혀 둔 어려운 단어들을 곧장 생각해내 선생이 본인보다 어휘력이 좋다는 칭찬을 곧잘 들었다.
실기까지는 약 4주, 총 9번의 수업으로 합격선을 넘어야 했다.
그렇게 쳤던 모의실기로 선생의 인정을 받아냈다.
이건 진짜. 됐다. 됐어요. 진짜 잘 썼다. 이대로 가면 돼.
하씨발 드디어 해냈다! 여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한양대 예비 1번에서 한양여대 문창과 실기를 보러 다니는 인간이 되었다.
남들 시선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그냥 삼수만 면하면, 대학 가서 글을 쓸 수 있다면, 미친개마냥 물고 늘어진 그 결실이 빛을 발하기만 하면 됐다.
어차피 남의 시선이 나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예비 1번이어도 탈락은 탈락이고, 오히려 전문대에 가면 비교적 싼 등록금으로 남들보다 일찍 졸업해 어디라도 취업을 할 수 있었으니.
글쓰기 외에는 딱히 관심도, 꿈도 없는 여름 입장에서 전문대에 진학하는 길이 오히려 더 효율적이고 좋은 방법이었다. (오히려 좋아)
그렇게 여름은 서울권 전문대와 서울예대 실기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성공했냐고?
성공했으면 이 브런치북 연재는 커녕, 회원가입도 안 했겠지.
귀하는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지원해 주셔서 고맙ㅅㅂ니다.
귀하가 된 여름은 해당 팝업창만 오바 보태서 100번은 본 것 같다.
그럼 여름을 기다리고 있는 선택지는 이제
그냥 죽기 VS 삼수하기
꽤나 미니멀해졌다.
음, 삼수하긴 죽어도 싫으니 그냥 죽어 볼까~하며 다시 술을 빨았다.
어떻게 하면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지 메모장에 꼼꼼히 적어두기까지 했다.
혹시 모를 추가합격을 기다리며 여름은 자살 시나리오를 구상한다.
모텔에서 자살하면 유가족이 피해 보상해야 하나요? 거지같은 질문하기가 전공이었는지, 여름은 이딴 거나 검색창에 입력하길 반복한다.
그런데 탈출구가 또 생겼다.
2월 추가모집.
추가합격이 아닌 추가모집.
신이 있다면, 신은 아마 여름을 상대로 죽지 마 이 죽일 년아를 시전하는 중일지 모른다.
그렇게 여름은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서울권 전문대에 지원한다.
일단 위치가 마음에 들고, 전문대 계열에선 꽤 이름이 알려져 있는 그런 전문대.
그냥 진X사에서 원서만 넣으면 됐다. 학과는 정말 아무거나. 어차피 붙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여름은 원서를 넣어 놓고 숨만 붙여 놨다.
그런 2월의 어느 날, 여름은 가족의 생일을 챙긴다.
지원한 학교 근처에서 전시회를 봤다.
좋은 전시도 보고, 좋은 카페에 가서 가족들과 호탕하게 웃으며 수다도 즐긴다. 삼수 생각따위 안 하고.
그때, 02로 시작하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온다.
안녕하세요, 00대학교 교무처입니다. 추가모집 신청한 한여름 님 맞으신가요? 네, 신입생 단위 추가모집 전형으로 합격되셔서 전화 드렸습니다. 합격 축하 드려요.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은 여름은 네, 네, 만 반복하다가 이내 소리를 지른다.
앜!!!!!! 진짜요? 정말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이후에 교무처 직원이 덧붙이는 등록금 유의 사항따위는 여름의 귀에 박히지 않았다. 날 수만 있다면, 당장 날고 싶었다.
그렇게, 지원한 학교에서 합격한 학교가 된 그 학교에 가 본다.
가는 길에서마저 또 다른 학교의 추가 모집 합격 전화를 받았다.
합격한 두 학교 모두 전문대 계열에선 잘 알려진 학교라 여름은 대답한다.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건 어려워요. 저희도 퇴근을 해야 하고, 지원자께서 빨리 결정해 주셔야 다음 지원자한테 안내가 가능해요.
까짓것, 거의 다 도착한 학교의 신입생이 되기로 한다.
그럼 탈락시켜 주세요.
-혹시 다른 학교에서 연락이 왔나요?
네
-아... 합격 축하 드려요
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놀랍게도, 여름이 도착한 그 학교, 이제는 신입생으로 땅을 밟을 수 있는 그 학교는 그와 이미 인연이 있는 상태였다.
당시로부터 11년 전, 여름은 제 혈육과 그 학교에서 등을 맞대고 장난스레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그렇게 여름의 반골 탕아 생활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