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라는 클리셰

by 짱강이


BGM - Glide


밤의 적막이 깔린 방 안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를 펼쳤다, 가 덮는다.

그리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펼치고, 접고

이내 제목도 기억도 안 나는 시집을 펼쳐다가, 얼굴에 덮는다.

침대에 뒤통수를 댄다.

눅눅한 고서의 냄새를 맡으며 한숨을 쉰다.

나는 왜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뭐가 그렇게도, 괴롭길래.


미래를 보고 싶으세요? 그럼 눈을 감아 보세요.

그냥 깜깜한데요?

네. 그게 당신 미래입니다.

일전에 봤던 시트콤의 대사를 떠올린다.

그래, 차라리 관짝에 들어가서 이렇게 눈을 감고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무저갱 저 구석에 처박힌대도, 지금보단 편하지 않을까. 사후세계따위 안 믿지만, 지옥 불구덩이가 지금 현실보단 백번 낫지 않을까.

여름은 생각만 할 뿐이다.

아, 그냥 묻히고 싶다. 이대로.








크게 하고 싶은 게 없던 여름 입장에서, 돈을 잘 버는, 게다가 자식을 위한 희생정신까지 넘치는 부모는 늘 감사하고 죄송한 존재였다.

여름은 본인이 가진 모든 걸 당연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오히려 빚을 지면 빚을 지고 있는 셈이라 치고, 부채감으로 몸을 움직이는 편에 속했다. 한여름은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 이에게 '너는 부모가 다 해줘서 좋겠다', '너는 그래도 부모님이 다 지원해 주시잖아', '나는 되려 네가 부러워', '돈이 최고야', '네가 뭐가 모자란데?' 와 같은 말들은 폭력에 불과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여름은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에게도 털어 놓지 못했다.

정확히는, 힘든 게 정확히 뭔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입만 열면 배부른 소리가 될까 봐,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을 애써 웃어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름은 본인의 불행이 어디서 근원했는지, 라는 문제를 덮어 버리기로 한다. 차라리 당장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이고 뜨거운 숨을 들이쉬는 게 더 도움이 됐다.

그래. 배불러서 그래. 배불러서. 배부르니까 진짜 행복하다. 너희가 돈이 왜 없는지 알아? 분수에도 안 맞는 꿈을 꿔서야. 그러니까 꿈을 접어. 그리고 돈 안 드는 방법으로 니들 하고 싶은 걸 하란 말이야. 그리고 돈 벌면 돼. 꿈을 접으라고 그냥. 다 접어 버리고 현실이랑 타협부터 해. 그럼 너희도 배불러질 수 있으니까. 너희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돈하고 니네 꿈하고 바꾸면 돼. 쉽지? 다 포기하고 살면 부자 돼.

돈 열라 많아지면 니들도 그 죽는 소리 좀 안 하고 살 수 있는데, 왜 그 쉬운 걸 못해서 아직도 질질 끌어대며 살아? 바보야? 돈돈 말만 하지 말고 좀. 니들 그렇게 사랑하는 거 끌어다가 살라고. 빚 끌어다가 살지 말고.

연기와 상념을 내뱉는다.

그렇게 또 상처를 덮고.




매일 7시 10분 등원, 8시 40분까진 아침 자율 자습, 8시 40분부터는 1교시.

그렇게 점심을 넘기고, 저녁을 넘기고, 11-12교시가 끝나면 하원. 또 우중충한 버스에 몸을 담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아직 3월이라서 그래, 아직 5월이라 그래, 아직...

되도 않는 조건부를 붙여 가며 이내 아프다는 결론을 내지 못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안타깝게도 여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여름은 비정상적으로 잠이 늘었고, 틈만 나면 죽은 눈깔로 허공을 응시했으며, 때때로 괴로워 보였다.

벚꽃이 피고 지고, 녹음이 지기 시작하고, 더위가 내린 땅 위에서도 여름은 그저 텅빈 눈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텅빈 눈이지만 무언가 담고 있긴 했다.

그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걸 잃어 버렸으나, 끝끝내 그게 무언지는 모르는 아이의 눈이었다.

여름이 그 무언가를 찾고 싶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그 즈음에 여름의 외조모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코로나 후유증인 것 같다고 했다.

여름의 세상이 그랬다.

여기 +100이 있으면 저기엔 -100이 있어서 결국엔 0이 도출되는 무의 세상.

당시의 여름이 어땠는지 물어도, 현재의 여름은 모르겠다는 답을 할 뿐이다.

정말 모르겠다고 한다.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낸 건지. 뭘 어떻게 한 건지.




너도 정신과에 좀 가 보자. 영 잠만 자고 이상하잖아.

외조모가 내뱉기엔 꽤 신선하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여름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그런 거였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까지 한다면 응당히 따라나서야 했다.

그렇게 재수를 하던 스무 살의 해에 여름은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다.


"잠을 너무 많이 자고요, 사고 기억이 계속 떠오르고요, 모르겠어요. 그냥 다 제 잘못 같아요. 제가 잘못돼서 그래요. 그날 제가 없었으면 그런 사고도 없었을 거예요."

다행히도 의사는 환자를 돌볼 줄 아는 이였다. 억지로 위로를 건네거나 건방진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끝끝내 여름에게 병명을 알려주는 일은 없었다.

그냥, 매번, 항우울제를 처방해 줄 뿐이었다. 용량을 늘려 가며 말이다.

그렇게 항우울제와 안정제가 늘며 시간이 흘렀다.




여름은 초여름에 들어서 동네 논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학원에서는 저녁 6시에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점점 나아지는 듯했다.

9평으로 여름을 마무리하고, 원하던 대학의 수시 최저까지 맞추며 대입 정도는 수월히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이 들어 왔다.

그렇게 가을이 왔다.

갑자기 여름은 아파진다.

진절머리가 난 몸상태에 여름은 학원을 그만둔다.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때부터 여름은 담배를 더 피워댔고, 자기 전엔 폭음을 일삼았다.

폭음을 한 후에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다가 이내 화장실에 가서 다 게워내길 반복했다.

그 해 가을은 여름에게 유독 잔인했다.


겨울이 왔다.

수능을 쳤다.

당연히 망했다.

논술을 넣은 6개의 대학 중 5개의 대학의 최저를 맞추지 못했다.

그래도 논술 시험은 보러 다녔다. 억울했으니까.

그렇게 희망을 걸 대학은 1개뿐이었다.

여름은 믿지도 않던 신에게 빌었다. 제발 그 대학에 붙여 달라고. 나 너무 힘들다고. 논술 시험도 너무 잘 치고 나왔다고.

그러나 여름에게 구원 같은 일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학은 서울에 위치한 한양대학교였고, 당시 여름이 지원한 과의 모집 정원은 4명이었다.

여름은 5등이었다.

720명 중에서 5등.

예비 1번이 붙었으나, 차라리 가망도 없는 불합격이 나을 지경이었다.

여름 같은 경쟁자가 이미 4명이나 찼기에.

더 높은 대학인 연세대학교의 인문 논술에는 수리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연세대학교 논술은 말 그대로 현대판 과거 시험이었기에.

그 대학으로 빠질 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렇게 여름은 이름도, 얼굴도 모를 4등을 평생 증오하며 저주하기 시작한다.

너만 없었어도 내 인생은 이 정도가 되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본인의 답안지를 채점한 한양대학교 교수들까지 증오하고 저주하기 시작한다.

내가 괴로웠던 거 두 배, 아니 열 배는 더 시달리면서 아주 오래오래 살아 달라고. 그렇게 중간에 죽지도 못하고 평생 말라 죽으라고.


이 즈음에 항우울제를 또 처방받고서야 확신이 들었다.

아, 나 우울증이구나.




출처 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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