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바쁜 일상의 선택을 덜어주는
나는 종종 서점에 의미 없이 가곤 한다.
딱히 무엇을 사겠다 라기보다
"가보면 하나 정도 살 책이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간다.
오랜 시간 동안 내 마음에 드는 책을 찾지만 결국에는 빈 손으로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스물한 살 무렵 책에 빠져있던 때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강이 있는 날이나 주말이면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서 민음사의 고전문학전집 중에 하나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추운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사서 건너편 커피빈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기억은 아직도 내게 있어서 따뜻한 기억 중의 하나다.
대학원 재학 시절의 교보문고는 내 논문을 쓰기 위한 레퍼런스가 가득한 장소였다.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나는 날이면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서 나에게 인사이트를 주는 책을 찾았을 때의 감동은 마치 또 다른 선생님을 만난 것 과도 같았다.
지금도 나는 교보문고를 가끔 간다. 딱히 무엇을 사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느꼈었던 그때의 감정들을 혹여나 떠오르게 할 만한 무언가가 있을까 해서다. 그러나 한 참을 책을 고르고 살펴봐도, 빈 손을 나오는 일이 허다하다. 책 보다 교보문고 주변 문구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이 곳에 왔을까?" 하는 생각이 최근에 자주 들었다. 전혀 내가 무엇을 얻고자 서점에 온 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의 불안감과 비례하는 나태함을 감추기 위한 장소로 서점을 택한 것이 아닐까?
이런저런 분주한 생각들을 가지고 도쿄를 갔었다. 본인이 도쿄를 가면서 가장 기대했던 점 중에 하나가 이 츠타야 서점이었다. 많은 종류의 서적들과 문구 그리고 전시들은 기대했던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나왔다. 너무 많은 선택지들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살 때 신중히 오래 고민하는, 때때로는 우유부단한 나의 성격이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법이라 했나, 이후 2 군데의 츠타야 서점을 방문했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나는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물론 츠타야 서점의 공간 분할, 서적 분류, 전시 테마 등 많은 것들을 배우고는 왔으나 물질적으로 내가 돈을 지불한 것은 없었다. 그러자 기대감보다 불안함이 앞섰다.
도쿄와 같은 대도시를 여행 가는 경우에는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아무리 여행 계획을 느긋하게 짰다고 하더라도 봐야 할 것, 사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큰 시간을 투자하였는데 얻고 나오는 것이 없다면 왠지 모르게 불안함이 커지는 경우가 생긴다.
현대인들은 현재를 살아가기에 너무도 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이 많은 것을 대신해주긴 하지만 그들이 해주는 것만큼 이상으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이 들 때까지 수도 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출근날의 당신'도 '휴가를 보내는 당신'도 그것이 '즐거운 선택'이던 '힘겨운 선택'이든 간에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 비록 그것이 사소한 책 고르기여도 말이다.
여행 마지막 날 긴자를 무작정 걸어 다니다 희한한 곳을 발견했다. 긴자의 번잡한 중심가에서는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조그마한 공간이 빛을 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 곳이 소규모 전시 공간인 줄 알았다. 한국, 삼청동 주변에도 이러한 곳이 많기 때문에 나는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은 전시보다 멋진 경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조그마한 공간에 놓인 책상 위에 단 한 종류의 책이 나를 맞이한다. 매주 단 한 권의 책만을 판매하는 모리오카 서점이다. 다른 책들은 놓여 있지 않다. 오직 단 한 권의 책만이 자신만을 봐달라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 곳의 주인 모리오카 유시유키가 수많은 책 중에 엄선한 단 한 권의 책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과 관련될 수 있는 전시를 열어 이 한 주 동안은 오롯이 이 책이 주인공이다.
어쩌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 시대 흐름에 어긋나는 발상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곳은 특별하다. 우리는 이 곳에서 단 2가지의 선택을 하면 된다.
"책을 사던지, 안 사던지"
경쟁 시대에 놀라울 정도로 무모한 자신감과는 달리 책상 위에 놓인 책은 서점 주인의 고뇌가 담겨있다. 마치 나와 같은 사람에게
"나는 당신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 번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에요."
라고 인사를 한다. 책을 고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 사람일수록 주인의 고뇌가 느껴질 수 있는 조그맣지만 많은 것을 담은 서점이다.
이 곳의 주인과 나누는 대화도 특별하다. 주인은 이번 주에 왜 이 책을 골랐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 이유에는 사회, 문화, 경제, 기술, 환경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적용한다. 단순히 주인의 기분에만 맞춰져 선정된 책이 아닌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을 고르기 위해 주인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을지는 감히 감이 안 온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소중한 누군가에게 선물을 고르듯 조심하고 세심하게 골라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 오롯이 그 시간에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 사람의 성격, 취향, 인상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그 사람에게 잘 어울릴 만한 것을 골랐을 때 비로소 나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기억에 남는 '좋은 선물'을 건네줬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단 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도 이렇게 많은 고민이 담기는데,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제안할 단 한 권의 책은 단순히 책 그 자체의 가치보다 더 빛나는 고민이 담겨있다.
이 서점을 방문하며 나는 내가 고민하고 있는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 경험이었다. 사용자 중심의 가치를 제공하기에는 수없이 많은 사용자 연구와 현재 흐름에 맞는 트렌드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사용자 중심의 경험 가치를 제안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선택지를 연구하고 사람들의 숨겨진 욕구(Unmet Needs)를 건드려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발견해서 제공해야 한다.
이 곳 모리오카 서점은 철저히 이러한 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가장 좋은 디자인은 고민할 필요가 적은 디자인이라고 했던가. 이 곳의 주인은 사람들의 고민은 오롯이 자신이 가져간 채 사람들에게 단순한 선택을 제시한다. UX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 큰 감동을 가져다준 기억이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가끔은 적은 것이 많을 때가 있다"라고 지었다. 이 것은 기술 발전으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우리들에게 역설적으로 다가올 수 도 있으나, 결국 본질은 물질적 가치가 크고 작음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경험 가치의 크기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모리오카 서점은 아주 쉽게 이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address: home-28-15 Ginza, Chuo-ku, Tokyo-to 104-0061
time: 13:00~20:00(월요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