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미디어 홍수 시대라, 인터넷에 없는 게 없다.
특히 소위 인터넷 '밈(meme)'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 것들을 친숙하고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뜬금없이 '밈(meme)'으로 서두를 연 이유는,
오늘의 주제에 걸맞는 멋진 밈 또한, 이미 월드 와이드 웹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짤의 제목은 무려 '외국인에게 한국 이름 멋지게 설명하는 법'이다.
국가와 문화권을 막론하고, 한 사람의 이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성(姓, family name)과 이름(given name).
여기에 서양인들은 종종 미들 네임(middle name)을 덧붙이고,
한자문화권에 사는 동양인들의, 두 자의 given name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같은 세대 사람들과 공유하는 글자'와,
'나만의 글자'로.
조금 더 공식적이고 간결한 어휘로 바꿔보자면, '항렬자(돌림자)'와 '항렬자가 아닌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사실 2021년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항렬자 문화는 일견 생소하다. 90년대 후반 출생자들만 해도, 엄격하게 항렬을 지켜 지은 이름이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설사 형제들 간에 동일한 글자를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대동항렬'에 따른 항렬자인지, 그 항렬자는 어떤 원리로 정해지는지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항렬자는 개명 신청 사유에서 순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족보상의 항렬자와 일치시키고 싶다, 이름에 선대 또는 후대의 항렬자가 들어있다, 같은 사유로 개명을 신청하면 허가율이 무려 81%에 달한다.(출처 :'개명도우미' www. namehelp. co. kr)
반대로, '특이한' 항렬자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사용되는 항렬자 중 '균(均)' 자나, '종(鐘)' 자의 경우, 어떤 글자와 조합해도 '예쁜 이름'이 나오기가 힘들다. 이런 특이한 항렬자의 '피해자(?)'들은 종종 원망섞인 불만을 토해내곤 한다. 그 놈의 돌림자, 좀 예쁜 글자로 만들면 안 되나!
대체 항렬자가 뭐길래,
대체 누가 왜 이런 걸 만들어서,
항렬자에 맞추겠다고 개명을 하며, 누군가는 예쁘지 않은 이름으로 곤욕을 치르는 걸까?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항렬자는 왜, 어떤 이유로, 어떤 이득이 있어서,
쓰이게 되었을까?
같은 세대의 형제들이 동일한 이름자를 공유하게 만드는 현상은, 무려 신라시대부터 관찰된다. 신라의 54번 째 왕인 경명왕(재위 917-942)이 아들들의 이름에 언(彦) 자를 사용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왕족들에게서 시작된 이러한 현상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상층 귀족들에게로 퍼져 나간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면 동성동본 내의 같은 세대가 모두 동일한 이름자를 공유하게 하는, '대동항렬'의 제정으로 이어진다. 이 시기 양반들에게 '가문'이란, 일생일대의 자랑거리였던 데다가, 상속과 제사에서 장자가 우선되고, 외손과 출가한 딸이 족보에서 배제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대동항렬'의 제정은 동성동본이라는 부계 혈연집단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기에 아주 좋은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름만 듣고도, 오, 자네는 어느 가문 무슨 파 몇 대손이군! 하고 서로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항렬자는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고, 또 순환하는가?
항렬자의 결정 방식은 (당연히) 가문마다 상이한데, 크게 두세가지 정도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많은 가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이다.
이름 그대로, 오행이 상생하는 방향으로, 즉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순서로 항렬자를 배정하는 방법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면, 파평 윤씨 소정공·장령공파의 항렬자는 이렇게 순환한다.
34세손은 중(重) 자를 항렬자로 사용한다. 근대 아동문학의 대부인 작사가 윤석중(尹石重, 1911-2003)이 이 항렬이다. 가운데 중(重) 자를 관통하는 흙 토(土) 자를 사용한 항렬자다.
35세손은 석(錫) 자를 썼다. 전(前) 검찰총장 윤석열(尹錫悅)과 야구선수 윤석민(尹錫珉)이 여기에 해당한다. 주석 석(錫) 자의 부수로 쓰인 쇠 금(金) 항렬이다.
36세손은 여(汝) 자를 쓴다. 배우 윤여정(尹汝貞)과 스포츠 해설가 윤여춘이 이 항렬이다. 너 여(汝) 자의 부수인 물 수(水) 자를 활용한 항렬이다.
37세손은 식(植) 자를 사용한다. 유도선수 윤동식(尹東植)이 해당한다. 역시 심을 식(植) 자의 부수로 나무 목(木) 자를 활용한 것이다.
그 외에도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활용한 다양한 순환들이 있다.
이를테면, 개그맨 이경규(李敬揆)의 규(揆) 자는 천간(天干)의 마지막 글자인 계(癸) 자를 활용한 항렬자고, 배우 이성재(李誠宰)의 재(宰) 역시 천간(天干) 중 신(辛) 자에서 온 항렬이다.
또, 축구선수 김남일(金南一)의 남(南) 자는 지지(地支)의 오(午) 자에서 온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김태년(金太年)의 년(年) 자도 마찬가지다.
근대의 도래와 신분제의 붕괴로 인해 많은 '상놈'들이 양반집 족보를 사 양반 행세를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항렬자의 본래 의미는 거의 사라진 상태다. 항렬자는 동성동본으로 대표되는 부계 혈족 간의 결속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동일 혈족 내부에서의 서열화에도 큰 역할을 한다. 문중의 모두가 모이는 집안 행사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났을 때, 호칭 정리를 위해 복잡하게 촌수를 따질 필요가 없어진다. 그저 통성명만 하고 나면, 족보의 항렬 상,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한 방에 정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 나열한 예시에서도 보이듯이, 배우 윤여정은 나이로 따지면 야구선수 윤석민의 할머니 뻘이지만, 족보 상으로는 한 항렬 아래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윤석민 선수도, 나이로는 20세 이상 차이가 지지만, 항렬 상으로는 동기 간이다. 재미있는 예시를 하나만 더 들자면, 개그맨 이경규와 소녀시대 써니(본명 이순규)는 같은 항렬자를 쓴다. 이런 와중에, 족보가 어떻고 항렬자가 어떻게 돌아가고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긴 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90% 이상이 '재미있어서' 다.
'유잼이고 싶은'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내가 특별히 재미를 느끼는 주제들만을 골라내는 중이다.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너는 그런 게 왜, 재밌어?'
쓰면서 생각해 봤다.
나는 이게 왜 재밌을까.
왜 항렬자 순환 원리 같은 것들을 찾아보면서 재미를 느낄까.
결국은 저 철 지난 관습을 통해서, 현재의 우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나는 항렬자를 엄격하게 지키는 (나름) 종갓집에서 태어났는데, 항렬자가 '여자애 이름에 쓰기에는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항렬자를 쓰지 않은 이름을 받았다. 이제 와서야 돌림자를 쓰지 않은 이름이라 다행이다, 싶지만, 어릴 때는 형제들과 이름이 다른 것이 꽤나 신경쓰였었다. 때때로 어른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왜, 우리 돌림자는 저거냐고.
내가 사랑하는 친구는 반대로, 특이한 항렬자 탓에 종종 다른 성별로 오해를 받는다. 친구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친구도 종종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왜 하필, 그 글자가 자신의 돌림자인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항렬자를 고려하는 빈도는 점차 줄어들고 있고, 앞으로는 항렬자니 돌림자니 하는 것들이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최근의 경향을 보면 멀지 않은 미래에 그렇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항렬자를 사용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항렬자로 인한 개명 신청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시대에 맞지 않게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와, 기타 여러 가지 사유들 때문에 항렬자를 신경쓰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해답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결국 논문과, 파평윤씨 종친회 홈페이지 같은 것들을 찾아보고 나서야, 오랜 의문을 풀었듯이.
참고문헌)
권익기, 김만태, <성명의 항렬자에 관한 고찰 - 항렬자의 전개 과정과 유형을 중심으로 ->,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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