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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파인 Jul 16. 2021

이름에 대하여(1)

사람은 하나인데 이름은 여러 개

당신의 이름은 몇 개인가요?


살면서 별로 받을 일이 없는 질문이다.

이름이 뭐예요? 또는 좀 더 격식을 차린다면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가 아니라 이름이 '몇 개'냐니.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이런 질문을 받아야만 할 것만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는 게 아님


바로,

전근대와 근대의 경계에 살았던,

구한말의 왕족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들이다.




사실 그 시대에 여러 개의 호칭으로 불린 건 비단 왕족들 뿐만이 아니었다. 선비들도, 자(字)니 호(號)니 하는 것들을 본명보다 자주 사용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성인을 이름으로 마구 부르는 걸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효와 충의 나라 조선에서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고, 이렇게 이름을 귀히 여기는 풍토는 흥미로운 관습 하나를 탄생시킨다.


이름하야, '피휘'다.


피휘(避諱).

피할 피(避)에 휘 휘(諱), 말 그대로 휘를 피한다, 즉 '귀하신 분의 이름자를 다른 글자로 바꿔쓰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아버지나 임금의 이름자를 함부로 쓰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름자에 관(觀) 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지금의 도지사에 비견되는 관찰사(觀察使)직을 사양한 사례가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관직명을 말하고 쓸 때마다 아버지의 존함을 범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에겐 꽤나 절절한 이유였다.


이러한 연유로, 왕실에서는 귀한 아기씨들이 태어날 때마다 상당히 고심했다. 흔한 글자를 아무렇게나 썼다가는 백성들을 괴롭게 만들 게 뻔했다. 그래서 왕들의 휘(諱)는 한 글자로,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거의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로 지어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아예 없는 한자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이를테면, 영조의 휘 '금(玪)'은 이제 금(今) 자에 구슬옥 변(王)을 붙여 새로 만든 글자다.

 



이런 풍습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한층 더 재미있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구한말 대한제국 황족들은 기본적으로 3개의 이름을 가지고 살았다. (자나 호는 포함하지 않은 숫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는 이름은 단연 '아명'이다. 높은 영유아사망률의 영향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좋은' 글자들이 많이 쓰였다. 12대 인종의 아명은 무려 억명(命)이고, 의친왕의 아명은 평길(吉)이었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에 걸맞는 예쁜 이름들도 많았다. 시인 윤동주의 아명은 해환이고, 그 동생들인 윤일주와 윤범환(성인이 되기 전에 요절했다)의 아명은 달환과 별환이다. 해, 달, 별. 하늘의 자연물들을 떠올리게 하는 예쁜 이름이다.  

 스스로의 아명에 쓰인 글자를 자식들의 아명에도 돌림자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의친왕이 그랬다.  길할 길(吉) 자를 아들들에게는 뒷글자로, 딸들에게는 앞글자로 주었다. 용길, 흥길, 창길 또는 길상, 길영, 길련 같은 식이었다.  


여기까지는 전근대나 근대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항구가 열려 외국의 온갖 물건과 사람들이 밀려든다고 해서 의료 수준이 단번에 획기적으로 개선된 건 아니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에는 아명으로 부르는 현상은 1960-70년대에도 흔했다. 서양의 '발달된' 제도와의 조우가 바꾸어 놓은 것은, 오히려 성인이 된 이후의 이름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이왕가(李王家)로 전락한 황실은 꽤나 많은 수난을 겪는다. 황위계승자였던 영친왕과, 고종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덕혜옹주가 유학을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영친왕은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일본의 장교가 되었고, 덕혜옹주는 이른 나이에 정신을 놓아버린다. 순종은 이왕(李王)이라는 형식적인 지위 덕에 그나마 창덕궁에 남았고, 의친왕은 왕위 계승권에서 먼 데다가, 그다지 위험할 것 없는 한량이라는 이유로 조선에 남을 수 있었다. 

 의친왕은 고종의 자식들 중에 가장 후손을 많이 남긴 인물이다.  일제는 병합 직후부터 해방 때까지 1-2년 터울을 두고 나오는 의친왕의 자식들을 의친왕의 호적에 올려주지 않았다. 의친왕의 호적에 올린다는 건 의친왕의 자식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이왕가의 일원으로서, 총독부에서 어느 정도는 의식주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망한 나라의 왕족들에게 들어가는 돈을 최-대한 아끼고 싶었던 일제에 의해, 무려 12남 9녀나 되는 의친왕의 자식들은 여기저기서 호적을 빌려와 겨우 출생신고를 했다. 주로 대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남계가 끊긴 방계 황족들이 주로 선택되었다. 


그 덕에 의친왕의 자손들은 아명을 제외하고도 두 개의 이름을 더 갖게 되었다. 하나는 호적에 올리는 '호적명'이다. 족보에 올리는 이름이라 하여 '보명'이라고도 부르는 이 이름은, 학교에 가거나, 왕실 밖에서 신분을 증명해야 할 때 사용되었다. 용(鎔) 자와 해(海) 자 같은 항렬 돌림자도 사용했다. 의친왕의 자식들은 해(海) 자를 돌림자로 썼다. 해청, 해원, 해경, 해석 같은 이름들이 그렇다. 

 다른 하나는 오랜 전통에 따른, 피휘를 고려한 외자 이름이다. 황실에서 쓰는 이름이라 '황실명'이라고도 부른다. 의친왕에게서 태어난 12남 9녀는 모두 호적명과 황실명을 따로 썼다. 이를테면, '마지막 황손'으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석 씨의 경우, '석'은 황실명이고, 호적명은 '이해석'이다.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책을 펴낸 이해경 씨도, '공'이라는 황실명을 따로 가지고 있다. 이구 씨 사후에 황사손이 된 이원 씨 역시, '원'은 황사손이 된 이후에 받은 황실명이고, 그 전에는 항렬자를 쓴 '상협'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이석 씨는 21세기에 들어서 해석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석으로 개명했고, 이원 씨 역시 황사손이 되면서 아예 황실명으로 개명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요소다. 

지금만큼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는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아명을 짓기도 했고, 피휘 같은 독특한 풍습도 있었다. 그리고, 항렬자라고 하여, 같은 세대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의 이름에 같은 글자를 쓰기도 했다. 요즘에는 이름자가 가지는 뜻이나 족보의 항렬보다는 듣기에 예쁜 발음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전히 특이한 항렬자 때문에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2)편은 항렬자에 관한 이야기다. 

때로는 투박한 이름을 만들고, 또 때로는 소속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돌림자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이미 세월 저 편으로 스러진 관습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내 이름이 왜 이렇게 지어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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