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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파인 Oct 10. 2023

1. 경복궁(2) 영제교부터 수정전까지

그 날로부터 경복궁은 다시 지어졌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복궁은 모두 그 날 이후의 것이다.


...라고 단언하듯 이야기했지만 사실 아니다.

고종 시대에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로 한 번도 불타거나 무너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건재했던 전각들도 있다.

정전(正殿)인 근정전, 임금이 평소에 집무를 보던 사정전, 아름다운 연못을 품고 있는 경회루와 그 남쪽의 수정전.


1천동이 넘는 전각들이 모두 철거되는 와중에 살아남은 것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요상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일제는 왜, 이들 전각은 제자리에 두었을까?


그 의문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궁궐 안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궁궐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할 다리가 있다.


금천교(禁川橋)다.


제자리에 복원된 영제교.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궁궐과 왕릉에서, 금천(禁川)은 너절한 바깥세상과 신성한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금천교란, 금천을 건너면서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라는 뜻을 담은 상징물인 것이다.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永濟橋)'다. 혀를 낼름 내밀고 있는 서수(瑞獸: 성스러운 동물)로 유명한 바로 그 다리다. 영제교는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위해 흥례문이 철거될 때 같이 헐려 나갔다. 흥례문과 근정전 사이, 즉 조선총독부 청사 자리에 위치한 탓이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1990년대 말이 되어서야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영제교의 끝에는 근정문(勤政門)이 자리한다. 근정전으로 통하는 문이다. 윗 사진에서 근정문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녹색 문창살이 근정전의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일제는 광화문과 흥례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밀어넣으면서도 근정전만은 그대로 두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보는 근정전은 1867년에 재건된 모습 그대로다. 적어도 외관에 한해서는 그렇다.

물론 내부의 어좌와 일월오봉도까지 멀쩡했다는 뜻은 아니다. 1930년대에는 총독부 경비원들을 위한 숙직실로 사용되었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주변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청사가 끝내 폭파되지 못하고 보다 온건한 방법으로 철거된 것도 근정전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국민적 공분에 호응하려다 혹시라도 파편이 근정전에 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흥례문이 복원되기 이전의 일이니 총독부 청사 뒤가 곧장 근정문과 근정전이었다.



제강점기도, 6.25 전쟁의 폭격도 무사히 견뎌낸 근정전은 아직도 건재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다. 이 땅의 주인이 바뀌지 않는 한.





사시사철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 근정전을 빙 돌아 뒤쪽으로 가면, 사정문을 마주하게 된다. 

편전인 사정전으로 통하는 문이다. 

경복궁의 편전이라고 하면 흔히 사정전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편전 권역에는 총 세 동의 전각이 있다.

중앙의 사정전(思政殿)과, 동쪽의 만춘전(萬春殿), 그리고 서쪽의  천추전(千秋殿).


경복궁 사정전. 양 옆으로 보이는 것이 천추전과 만춘전이다.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정(思政)'은 잘 알려졌듯이 유교 경전인 《시경》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고, '천추(千秋)'와 '만춘(萬春)'은 각각 '천 번의 가을'과 '만 번의 봄'이라는 뜻으로 아주 오랜 세월을 의미한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만세토록 지속되기를 바랐던 누군가의 염원이 느껴지는 작명이다.

사정전에는 마루가, 천추전과 만춘전에는 온돌이 깔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조선의 임금들은 여름에는 사정전에서, 추운 겨울에는 천추전이나 만춘전에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각설하고, 세 동 모두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온전했다. 역시 외관만.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을 때 전시실과 경비실 등으로 사용되었으니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만춘전이 전소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만춘전은 20세기 후반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사정전에서 서쪽으로 나가면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질적인 두 동의 전각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붙어 있다. 경회루와 수정전이다.


경복궁 경회루와 수양버들.


경회루는 경회루다. 아름다운 연못 위의 아름다운 누각.

어쩌면 경회루는 그 덕에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워서.

조선의 궁궐 그저 이색 관광지나 나들이 명소로 전락하기를 바랐던 일제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것이 없다. 단일 평면에 지어진 궁궐 건축으로는 제일 규모가 큰 경회루는 지금도 가까이 가면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경회루 남쪽은 궐내각사의 자리다. 이름 그대로 궁궐 내부에 위치한 관청들을 말한다. 국왕과 왕실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는 내의원과 국왕의 비서실인 승정원, 항상 국왕의 주위를 맴돌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춘추관 등 모두 국왕과 가까운 관청들이다. 

한때는 이러한 궐내각사들이 경회루 남쪽에 복작였을 테지만, 지금은 단 한 동의 전각만이 남아 여기에 궐내각사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정면에 월대가 높이 드리워진, 수정전이다. 


경복궁 수정전.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수정전은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처음 지어진 건물이다. 조선 전기에는 같은 자리(혹은 그 주변)에 집현전이 자리했다고 전해진다. 고종 시기에는 사정전과 함께 국왕이 평소에 집무를 하는 편전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이 드나드는 중요한 건물에 설치되어, 건물의 위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했던 월대가 수정전에 설치된 것도 이 때문이다.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되었을 때, 그래서 주변의 다른 전각들이 모두 철거되었을 때, 수정전은 홀로 살아남아 전시관이 되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부속 전시실이 되어 일제강점기 내내 오타니 컬렉션*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의 자리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지어지기 전까지 한국민속관 건물로 사용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내부가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서두의 질문은 적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격랑의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 어떠한 것도 '건재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각들도 외관만 겨우 보존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1867년에 경복궁이 중건될 때 세워진 전각이 아직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살펴볼 대부분의 전각이 1990년대 이후에 복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히 지켜낸 것이 겉껍데기 뿐이라도, 그조차 없는 것보다는 뭐라도 남아 있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이는, 대한민국의 문화재 복원 정책의 큰 줄기를 이루는 명제이기도 하다. 

그게 무엇이든, 뭐라도 있는 편이 낫다.  

그 일념하에 경복궁은 아직도 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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