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인간이 누려야 하는 복도 다섯 가지라고 보았다. 장수하는 것, 부를 누리는 것, 강녕하게, 즉 건강하게 사는 것, 덕(德)을 따르는 것, 그리고 객지가 아닌 자신의 집에서 편안히 일생을 마치는 것.
경복궁에서도 오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임금이 잠을 자고 사적인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은 아예 대놓고 이름이 '강녕전'이다.
경복궁 강녕전.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경복궁의 정문이 광화문인 것처럼, 궁궐 안의 모든 전각들도 각자 자기만의 '정문'을 거느리고 있다. 지금이야 격동의 근현대를 거치며 전각을 둘러싼 행각이 대부분 철거된 상태지만, 행각이 모두 온전하던 시절에는 각 전각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것들이다. 정문이 근정전의 정문은 근정문이고 사정전의 정문은 사정문이다.
그렇다면 강녕전의 정문은? 향오문이다. 향할 향(嚮)에 다섯 오(五), 말인 즉슨 오복을 (마음껏) 누리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강녕전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앞에서부터 차근히 따라온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아-, 일제가 철거했구나? 또 조선물산공진회 때문이지? 하고. 안타깝지만 틀린 답변이다.
고종 시대에 중건된 강녕전이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은 맞다. 철거의 주체가 일제인 것도 맞다. 하지만 조선물산공진회 때문은 아니다. 1917년,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기거하던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에 화재가 발생했다. 불타 없어진 건물들을 다시 지을 때,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과 교태전 건물을 해체해서 가져다 썼다. 즉,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창덕궁 희정당 건물은 곧, 경복궁 강녕전 건물이다.
강녕전의 북쪽에는 교태전이 자리한다. 강녕전이 왕의 침전이라면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교태전의 정문은 양의문이다. 두 양(兩)에 모양 의(儀) 자를 써서 양과 음, 즉 왕과 왕비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잘 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복궁 교태전.
역시 1995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창덕궁에 화재가 나서 강녕전이 희정당으로 탈바꿈할 때, 교태전 역시 창덕궁으로 옮겨져 대조전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창덕궁 대조전 건물은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 교태전 건물이다.
강녕전과 교태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위 사진에서 기와 지붕 위로 하얗게 덧칠된 부분을 용마루라고 하는데*, 강녕전과 교태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에도 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유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왕과 왕비는 이미 용에 비견되므로 지붕의 용마루가 전각 안의 용을 누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랬다는 설, 용마루는 무거운 지붕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조물이므로 건축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필요가 없게 되었고, 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이러한 최신의 건축 기술이 제일 먼저 적용되었다는 설 등.
그런데 재미있는 건,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다 지었다던 창덕궁 희정당에는 용마루가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창덕궁 편에서 밝혀집니다. 커밍 쑨.
이제 줄곧 북쪽을 향하던 걸음을 잠시 동쪽으로 틀어볼 시간이다.
사정전의 동쪽에는 세자가 미래를 준비했던 동궁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의 왕성이었던 경주 월성에서부터 후계자의 공간은 왕궁 동쪽에 위치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궁은 종종 세자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세자 그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각설하고, 경복궁의 동궁 권역에는 크게 두 동의 전각이 있다. 자선당과 비현각. 자선당은 세자의 침실, 비현각은 공부방이다.
복원된 경복궁 자선당.
기를 자(資)에 착할 선(善) 자를 써서 선하고 바른 기질을 길러내라(= 공부를 열심히 해라)는 의미를 담은 자선당은, 아마도 이 시리즈에서 소개할 전각들을 통틀어 제일 슬픈 곳이 아닐까 싶다.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서 철거된 수많은 전각들은 다수가 일본인이나 조선인 친일파들에게 팔려나갔다. 어디 사찰의 부속건물이 되기도 했고, 또 어느 일본인 수집가의 개인 박물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한 때는 세자가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며 미래를 준비했던 자선당도 마찬가지였다.
원래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자선당의 새로운 주인이 된 사람은 오쿠라 기하치로라는 일본인이었다. 오쿠라는 자선당을 일본으로 가져가 자신이 운영하는 호텔의 별관으로 사용하며 여기저기서 모은 수집품을 전시했다. 조선에서 떼어 온 건물이라 이름도 조선관이었다. 자선당이 철거된 자리에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들어섰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꽤나 얄궂은 인연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오쿠라 호텔은 큰 화재 피해를 입었다. 이후 호텔은 다시 지어졌지만 자선당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불에 타고 남은 유구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다가 1970년대 즈음에는 정원석으로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이 유구가 마침내 경복궁으로 돌아온 것은 1995년의 일이다. 자선당을 복원할 때 사용하려고 했으나 훼손 정도가 너무 심해 건청궁 뒤쪽에 따로 보존 중이다.
자선당 유구.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지금의 자선당과 비현각은, 1999년 복원된 것이다. 사방의 행각까지 모두 복원한 덕에, 상당히 아늑하고 고요한 공간이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자선당 월대에 앉아(툇마루에 앉으면 안 된다. 문화재는 보호해야 하니까.) 이 전각이 거쳐 온 길을 한 번쯤 되짚어 보면 어떨까?
이 편에서 살펴보고 있는 전각들은 모두 주인이 명확하다. 강녕전은 왕의 것이었고, 교태전은 왕비의 것이었다. 또, 자선당과 비현각은 미래의 군주인 세자의 것이었다. 아래에서 살펴볼 자경전은 바로 왕대비의 공간이다.
경복궁 자경전.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실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각이다. 물론 왕대비가 기거했다는 기록이 있는 전각은 많지만, 애초에 왕대비를 '위해서' 지어진 전각은 다른 궁궐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경복궁에서조차 1867년에 중건되기 이전에는 없었던 전각이다. 왜 갑자기? 당연하게 떠오르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복궁 중건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종 시대의 경복궁 중건'이라고 줄곧 말해왔지만, 사실 경복궁 중건을 주도한 사람은 고종이라기보다는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는 데에는 당시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 조씨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는 전임자였던 철종이 아들없이 사망했기 때문인데, 뚜렷한 후계가 없이 왕이 승하했을 경우에는 왕실의 큰 어른인 대왕대비가 다음 왕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종이 그러했고,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각설하고, 고종은 신정왕후 '덕분에' 즉위했고,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 '덕분에' 대원군이 되었다. 그에 대한 보답이 바로 경복궁에 있는 자경전이다. 유달리 크고 위용있어 보이는 겉모습과, 화려한 꽃담이 그 방증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자경전은 고종 시대의 모습 그대로다. 철거되거나 불에 타지 않고, 긴 세월을 고스란히 견뎌냈다. 6.25전쟁 당시 폭격을 맞기는 하였으나, 원형을 살린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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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에서 하얗게 덧칠된 부분은 용마루에 양성바르기를 한 것이다. 궁궐이나 사찰 등지의 큰 건물에 용마루를 크고 두껍게 얹었을 경우에는 강회와 백토를 섞어 양성바르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