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공식적이고 자주 사용되는 말로 바꾸자면, 경복궁은 복원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사업은 지금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복원이란 무엇인가? 바꾸어 말하면, 무엇이 '복원'인가?
사전적 의미의 문화재 복원은, 과거에는 존재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원형을 잃어버린 건축물을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 놓는 것, 정도로 정의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원형을 꼭 되살려야 할까? 경복궁의 시간을 고종 시대까지 돌려놓는 것이, 바람직한 복원의 유일한 길인가?
경복궁 편의 마지막 이야기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미래의 경복궁에 관한 것이다.
처음으로 살펴볼 전각은 향원정이다. 연못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특수성 때문에 관람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공간이다.
경복궁 향원정. 뒤쪽으로 하얀 아치형의 다리가 보인다.
고종 시대에 처음 세워진 건물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경복궁 후원에 향원정 대신 취로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북악산에서 내려온 호랑이를 세조가 이 부근에서 때려잡았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각설하고, 향원정은 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겨울이 되어 연못에 얼음이 얼면, 한양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바로 북쪽에 건청궁이 붙어 있고, 이 시기의 고종과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의 눈을 피해 건청궁에서 지냈다는 것을 고려하면, 향원정은 경복궁 전체의 뒤뜰이라기보다는 건청궁의 앞뜰로 이용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왜 이렇게 장황하게 하느냐, 바로 육지(?)에서 향원정으로 통하는 다리 때문이다. 취향교라는 이름을 가진 이 다리는, 지금은 위 사진과 같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즉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하도록 놓여있다. 그러나 불과 6-7년 전까지만 해도, 다리의 방향이 반대였다. 아래 사진처럼.
복원 이전의 향원정. 출처) 문화재청, 「경복궁 향원정 보수공사 해체실측 및 수리보고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향원정은 온전했다. 불에 타거나 철거되지 않았다. 6.25 전쟁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수한 포탄이 서울 하늘을 수놓았지만 향원정은 비껴갔다. 대신 취향교가 폭격을 맞아 완전히 파괴되었다.
향원정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다시 놓인 것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이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빠른 복원이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방향이 옥의 티였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아 있었다면 향원지를 반 바퀴 빙 돌아 정자에 올라야 했을 판이었다.
왜 이렇게 복원했을까? 한국 전쟁 중에 파괴된 것을 전쟁 직후에 복원했으니 이전의 형태에 대한 사진이나 자료가 없었다는 것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사진만 여러 장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원형의 복원보다는 관람객의 편의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예외없이 항상 남쪽 방향에서만 향원정을 마주하게 될 현대의 관람객들에게야, 취향교가 남쪽에 놓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우니까.
60년이 넘게 남쪽에 자리했던 취향교는 2018년부터 진행된 향원정 보수공사와 함께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형태도 갈색 일자형 다리였던 것이 원형을 살린 흰색 아치형으로 바뀌었다.
향원정에서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오면 자그마한 전각 두 동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함화당과 집경당이다. 역시 고종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경복궁 중건 이후로 강녕전과 교태전이 있는 내전 권역에 화재가 자주 발생했고, 또 고종과 명성황후가 생활의 중심을 건청궁으로 옮기면서 경복궁 북쪽 영역에 몇 개의 전각이 더 지어졌다. 함화당과 집경당의 건립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요새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전각이다. 바로 오른쪽에 관람객들의 시선을 다 앗아가는 거대한 eye-taker가 자리한 탓이다. 정체 모를 높은 불탑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국립민속박물관이다.
함화당 담장 너머로 바라본 국립민속박물관의 불탑.
원래는 선원전이 있던 자리다. 역대 왕들의 어진을 보관했던 장소다. 신위를 모신 종묘가 궁궐 바깥에 있는 사당이라면, 어진을 모신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던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부터가 그렇다. 옥구슬 선(璿)에 근원 원(源), 오래도록 이어져 온 귀한 계보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경복궁 제일 안쪽에 위치했던 선원전은 역시 일제강점기에 헐렸다. 이후 장충단공원 부근으로 옮겨져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인 박문사에서 승려들의 숙식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자리에 박물관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66년이다. 처음의 용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이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이 구 조선총독부 청사로 옮겨간 뒤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되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불탑 형식의 구조물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유교 국가인 조선의 법궁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경복궁 2차 복원기본계획에 국립민속박물관의 이전과 선원전의 복원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간 시간이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부속 건물들이 박물관을 건립할 때 모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박물관을 세우는 과정에서 기존 전각들의 유구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불탑 형식의 구조물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유교 국가인 조선의 법궁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경복궁 2차 복원기본계획에 국립민속박물관의 이전과 선원전의 복원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간 시간이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부속 건물들이 박물관을 건립할 때 모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박물관을 세우는 과정에서 기존 전각들의 유구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시대와 환경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그 시간선 위에 놓여 있는 이상 문화유산 역시 변화의 바람을 피할 수 없다. 오래된 한옥에 입식 부엌과 화장실이 설치되고, 현대인들의 쓰임에 맞게 한복이 개량되듯, 궁궐 건축물 또한 어느 정도의 변형을 겪는 것은 일견 이치에 맞는 일일지도 모른다. 향원정의 취향교가 관람객의 편의에 맞게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복원' 되고, 어진도 그저 문화재의 일종이 되어버린 시대에 선원전 자리에 거대한 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이렇게 본다면 덮어놓고 아쉬워만 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문화재정은 장장 1천일이 넘는 기간의 보수공사를 통해 '원형'의 취향교를 되살렸다. 또, 국립민속박물관을 통째로 세종시로 옮겨 가면서까지 선원전을 '복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디 그 뿐인가. 수정전 일대의 궐내각사 영역은 물론이고, 지금은 경복궁 주차장이 들어서 있는 오위도총부 영역마저도 2차 복원정비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최대한 많은 전각을, 최대한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복원하겠다는 의지는, 유독 경복궁에서 활활 타오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법궁.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마수가 가장 강하게, 그리고 깊숙이 침투한 곳. 때문에 해묵은 치료와 극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곳.
앞으로도 경복궁은 계속 복원될 예정이다. 205동의 전각이 끝끝내 제자리를 찾는 2045년까지.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세대와 세기를 넘긴 집단적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케케묵은 상흔이, 치유될 수 있을까?
사실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과거를 정리하기 위해, 그래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