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 동안 창덕궁을 거처로 삼았던 이들의 호칭은 시대와 정치의 변화에 따라 무려 두 번이나 바뀌었다. 명나라를 천조로 모시는 동방의 제후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그리고 다시 '이왕'으로.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나라를 잃었으나 대한제국 황실 가족들은 여전히 왕족의 지위를 유지했다.
앞 문장을 읽으면서 한 번쯤 멈칫하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읽어보자. 대한제국 '황실' 가족들은 여전히 '왕족'의 지위를 유지했다.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지만 왕실은 해체되지 않았다. 일종의 회유책이자 대외선전책이었을 테다. 일본이 무력과 강압으로 한국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병합을 요청했다, 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시그널. 그래서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을 짓밟아 없애는 대신 '이왕가'라는 애매한 칭호를 주고 일본 천황가에 편입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이왕은 오얏 이(李)에 임금 왕(王), 글자 그대로 '이(李)씨 성을 가진 왕'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집 가(家) 자를 붙인 '이왕가'는 역시 글자 그대로 이왕의 일가라는 뜻이다. 이름에서도 보이다시피 특정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라기보다는 천황가 내에서의 지위를 설정한 것에 가깝다. 이에 따라 한일병합 당시를 기준으로,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하고 물러나 있던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이왕(李王)' 이 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쭉 덕수궁에 머물렀다. 하지만 순종은 양위를 받은 직후에 창덕궁으로 옮겨와서, 1926년에 사망할 때까지 창덕궁을 떠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하에서 우리가 살펴볼 창덕궁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사는 궁궐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은 하나도 없이 그저 일제의 감시와 보호 아래 겉으로는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이왕가'의 거주지였음을 주목해 주시길 바란다.
경복궁의 정문이 광화문이었다면,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이다.
경복궁에서는 광화문을 넘어 근정전을 찾아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직진만 하면 된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교태전까지 모두 남북 방향으로 뻗은 일직선 상에 정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덕궁은 다르다. 돈화문을 넘어서 정전인 인정전까지 가는 길이 경복궁에 비하면 꽤 험난하다.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널 때 한 번, 그리고 인정문(인정전의 정문이다) 앞에서 또 한 번 꺾어야 비로소 인정전을 마주할 수 있다.
창덕궁 인정전.
앞서 보았던 경복궁 근정전과는 어딘가 달라 보인다. 외관으로 뚜렷이 보이는 차이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노란색 문창살, 그리고 둘째, 용마루에 박힌 꽃 모양의 장식.
문창살을 노란색으로 칠한 이유는 간단하다. 창덕궁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 순종이 머물렀던 궁궐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오방색 체계에서 황색은 중앙을 상징하는 색이고, 중앙은 언제나 황제의 자리이기 때문에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했다. 황제궁의 정전이니, 자연히 문창살도 황색으로 칠하게 된 것이다.
용마루를 장식한 꽃은 오얏꽃이다. 이는 왕가의 성씨에 오얏 이(李) 자를 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오얏꽃을 형상화한 이화문(李花文)은 조선 초기부터 전주 이씨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통용되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상징체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태극 문양과 함께 국가와 황실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근대의 궁궐 건축에서는 이화문 장식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창덕궁과 덕수궁에서는 곳곳에 숨어 있는 이화문을 발견하는 것 또한 소소한 재미다.
인정전 용마루에 언제, 혹은 어떤 이유로 이화문을 장식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08년에서 1909년 사이에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각에서는 1930년대 이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일병합 이후 순종이 승하하는 1926년까지, 인정전은 국가 공식 행사를 치르는 정전이 아니라 순종이 외부인들을 만나던 알현소로 사용되었다. 바뀐 용도에 따라 내부 인테리어 또한 바뀌었다. 물론, 과거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총독부의 보호 아래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왕, 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일제의 의도 또한 일부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창덕궁 인정전 내부.
보시다시피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창문에는 커튼이 걸렸으며, 유리창이 설치되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닥에는 일본식 마루가 깔렸다. 내부의 어좌와 일월오봉도 또한 철거되었다. 인정전 앞 마당(조정이라고 한다)에 깔린 박석을 걷어내고 잔디와 조경식물을 심었다는 기록도 있다.
해방 이후 어좌와 일월오봉도, 조정의 박석 등은 차례로 복원되었으나 내부의 샹들리에와 커튼, 그리고 일본식 마루는 여전히 남아있다. 따라서 현재의 인정전에는 격동의 근대를 거치며 변형된 모습과 그 변형 이전의 모습이 공존한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다르다. 창덕궁과 창경궁도 다르고, 창경궁과 덕수궁 역시 다르다. 애초에 궁궐을 건립한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새 나라의 법궁으로 지어진 궁궐과,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 그리고 전쟁 중에 잠시 머물기 위해 궁궐로 개조한 양반집은 당연히 그 규모와 구조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복궁이든 창덕궁이든 덕수궁이든 기본적으로 '궁궐'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임금이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려면 꼭 필요한 전각들이 있다. 가장 중심이 되는 정전이 그렇고, 왕이 평소에 집무를 보는 편전도 그러하며, 잠을 자는 침전은 말할 것도 없다. 서울 시내의 궁궐들은 크기와 구조와 형식이 제각각이지만, 그 와중에도 정전과 편전, 그리고 침전은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서설이 길었다. 창덕궁의 정전을 살펴 보았으니 이제 편전을 만날 차례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다.
창덕궁의 편전은 선정전이다. 주변의 지형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며 지은 궁궐인 탓에 인정전에서 선정전을 가려도 여러 번 길을 꺾어야 한다. 인정문으로 돌아 나와서 한 번, 그리고 숙장문을 넘어서 또 한 번.
멀리서 바라본 선정전의 청기와.
선정전은 현존하는 궁궐 건축물 중 유일하게 청색 기와를 얹은 전각이다. 전근대 동양에서 청색은 구현하기가 어려웠다. 선정전의 청기와도 중국에서 회회청이라는 비싼 안료를 수입해 구운 것이다. 따라서 검소와 검약을 높게 치는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쓸데없는 사치라 하여 궁궐에도 함부로 청기와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왜 선정전에는 청기와를 얹었느냐. 인경궁에서 떼어 온 전각이기 때문이다. 일견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궁궐 건설에 집착했던 광해군이 인왕산 자락에 새로 지은 궁궐이 바로 인경궁이다. 거의 모든 전각의 지붕에 청기와를 얹었다고 전해지는 인경궁은 인조 연간에 해체되었다. 이 때 대부분의 전각을 창덕궁이나 창경궁으로 옮겨 왔는데, 지금의 선정전 건물도 그 중 하나다.
그리고 선정전은 그 때 그 모습 그대로다. 광해군이 욕심을 부려 얹은 청기와 지붕, 그리고 인조 연간에 창덕궁으로 옮겨온 그 상태 그대로. 물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창호지가 유리창으로 바뀌고, 내부 인테리어가 바뀌는 등의 변형은 있었지만(지금은 모두 복원한 상태다), 건물의 외관 자체는 17세기에 지어진 이후에 한 번도 무너지거나 불타지 않았다.
선정문을 지나면 왠지 긴 복도를 지나게 된다. 조선 후기에 혼전 혹은 빈전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이다. 혼전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임금과 왕비의 신위를 임시로 봉하는 곳을, 빈전은 상여가 나가기 전에 관을 임시로 보관하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혼전과 빈전에는 선정전에 보이는 것과 같은 복도각을 설치해서 혼령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즉, 조선 후기에 선정전은 편전이 아니라 장례와 관련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편전은? 임금님은 평소에 집무를 어디서 보았을까? 다음 편에서 밝혀집니다. 커밍 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