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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Oct 28. 2021

◉‘刹那’의 순간


◉‘刹那’의 순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여주인공 테레자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심한 구박을 당하면서 성장합니다. 엄마는 테레자에게 온갖 궂은 일은 다 시키고 나가서 돈까지 벌어오라는 요구를 합니다. 급기야 엄마는 딸 테레자에게 이런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습니다. 


“너 같이 쓸모없는 아이가 태어난 이유는 너를 낙태 해 줄 의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야.”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테레자는 자존감이 강한 여자였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찾고 싶어하죠. 테레자가 늘 책을 읽고,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테레자는 책을 통해서 혹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알고 싶어합니다. 여기까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확인하고 싶어 하는 보통의 정서입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분명 있다고 믿고 싶어 하고, 그에 걸맞게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듯, 쿤데라는 인정사정없는 말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깎아내려 버립니다. 우리가 탄생한 이유는 그저 욕망에 젖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일 뿐이며, 그 세포는 그것을 낙태할 의사를 만났다면 이 세상에 빛을 보지도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요. 쿤데라가 보기에 인간 존재의 의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습니다. 그것의 연장선 상에서 삶과 죽음도 ‘찰나’와 같습니다. ‘존재의 의미가 없다’라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가 작을 수도, 클 수도 있겠지만 그 무게는 깃털만큼 가볍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과히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에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찰나’의 순간이 나옵니다. 길을 가다가 버스 검문에서 걸린 유대인 소년 죄르지는 그 자리에서 강제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그 수용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게 되는데요. 의사들은 죄수들을 신체검사 하면서 이 죄수를 가스실로 보낼지 노동의 현장으로 보낼지 결정합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시간은 단 1초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의사는 그 ‘찰나’의 순간에 한 사람의 생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죠. 케르테스는 그 1초 동안에도 죄수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죽음은 또한 ‘찰나’에 결정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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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가가 공통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은 탄생과 죽음에 대한 ‘별거 없음’에 대한 통찰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진실입니다. 우리는 이 진실을 먼저 전면적으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탄생과 죽음이 ‘찰나’와 같은 순간에 결정 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두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러니까, “인간과 세계가 이렇게 의미 없는 존재이고 세계인데도 살아볼 만한 것인가?”,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뮈도 얘기했듯이, 이 세상은 “의미가 있어서” 사는 게 아닙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와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삶에서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투쟁’입니다. “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질문을 스스로 가져본 사람이라면, 이미 삶과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암튼, 투쟁은 투쟁이니, “지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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