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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Sep 27. 2021

드라마<오징어 게임>에는 '있고' 현실에는 '없는 것'


◉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있고’ 현실에는 ‘없는 것’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연일 화제다. 나도 명절 연휴에 몰아서 다 봤다. 

생각보다 단순한 내용인데 사람들의 감상들은 무성한 것 같다. 그 많은 ‘말들의 잔치’에서 나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부분(내가 알기로는)을 짚어보고 보려고 한다. 


가장 많이 공감하는 부분은 「오징어 게임」이 자본주의의 지옥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세계에서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악습과 폐단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한국 사회라고 하지 않던가. 극심한 양극화, 불평등과 차별, 혐오,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파국을 맞는가. 이것은 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한마디로 ‘을들끼리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데,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그 게임의 지옥도에서 보이는 행동과 맞닥뜨리는 상황들이다.


먼저, 그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밖으로 나갈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게임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의사부터, 서울대를 나온 사람, 수학자, 가정주부, 탈북자, 건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이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게 된 배경은 단 하나, 바로 ‘돈’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황동혁 감독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안전을 누릴 수 있는 계층은 이제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굳이 있다고 고집하자면, 소수의 재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재벌도 그 세계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며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사회에서는 이제 좋은 학벌도, 사회적 지위도, 개인의 탁월한 능력도 언제까지나 그 사람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불안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이 세계에서 만들어낸 ‘저주’라 할 수 있다. 죽는 순간까지 ‘불안’해하는 존재인 것이다.  


 최동혁 감독은 「오징어 게임」에서 이런 인간들의 불안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최종 승자로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건 경쟁에 스스로 빠져드는 사람들, 서로를 믿지 못해 잠을 자는 시간에도 불침번을 서며 서로를 감시하는 모습, 서로 손을 내밀다가도 쉽게 배신을 하는 모습들. 이들의 악다구니를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눈앞에 보이는 돈이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으로 들어가는 데에 대한 불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오징어 게임’ 판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실행시켰는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그 살육의 전쟁에 감춰진 것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알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들의 욕망은 오로지 ‘살아남는 것’에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그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존재는 분명 있다. 그는 오일남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가지고 있는 부자이다. 드라마의 마지막에서 오일남은 도대체 왜 이런 게임 만들었냐는 기훈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돈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재미가 없어. 그래서 재미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 게임을 하게 된 거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게임이 단지 한 늙은이의 ‘재미’ 때문이었다니. (부자가 죽는 이유는 ‘권태’ 때문이라고 한다.) 이 황당한 대답에  최종 승자로 살아남은 기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앞서 ‘오징어 게임’을 ‘을들끼리의 싸움’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 싸움은 결코 ‘결판나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게임의 참가자들은 이 게임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설계하고 실행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싸움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그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욕망’을 연료 삼아 자동으로 굴러가는 시스템과 같다. 


드라마와 현실은 다른 점이 드러난다. 드라마에서는 오일남 혹은 돈으로 상징되는 싸움의 대상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기훈이 마지막에 그를 찾아가 도대체 왜 이런 게임을 설계했냐고 물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다르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싸움의 대상이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더라도 알 수 없다.’ 한마디로 지금은 싸움의 대상이 불명확하고 불확실한 시대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불안한지 모르는 채로 불안에 떨면서 산다. 하루하루 꽉 찬 계획표를 만들어 열심히 살지만, 삶에 대한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삶이 힘들고 고달픈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삶은 점점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 원인을 찾아내기 힘든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을 쉽게 자신의 능력 부족이나 ‘금수저’,‘흑수저’와 같은 계급론으로 돌린다. 


바로 이 점이 황동혁 감독이 놓친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경쟁에서 비롯된 인간 탐욕을 그대로 보여주었지만, 그 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부분’의 작동 원리를 캐치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이 훌륭하다고 판단한다. ‘오징어판’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병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라는 질문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황동혁은 묻는다. ‘오징어 판의 병졸들과 당신은 다르냐고.’, ‘그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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