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텅 빈 공간으로 찔러 넣는 칼
거칠게 말하자면 모든 인문적 글들은 하나의 공통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작품인 시와 소설은 물론이고 칼럼이나 평론, 학술적 글들도 그 방식이 다를 뿐, 여러 가지의 사례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그 끝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모아진다. 그러니까 싸우지 말고, 서로 배려하고, 욕심 좀 부리지 말고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지성사의 핵심 가치가 아닐까 싶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성경이 그래서 수천 년 넘게 살아남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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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나는 ‘착하게 사세요’라는 말로 이해한다. 예수가 아닌 이상 인간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무에게나 베풀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그 말의 의미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 정도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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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착하게 산다’라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때 나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착하게 살기 위한 마음과 태도’를 기르기 위한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세상의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과 우리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은 결국 개개인이 ‘착하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겠냐고. 인문적 공부가 그걸 도울 수 있다고.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착하게 사는 것은 배움과 지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너무 많이 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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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부는 학위를 따고 어느 자리에 가고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결과물을 내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입신과 출세, 혹은 지적 허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다. 정말로 스스로 ‘착한 인간’이 되기 위한 마음과 태도를 기르는 공부가 진짜 공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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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삶이 일치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그럼에도 나는 ‘착하게 사세요’라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부터도 어떻게 하면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 수 있을까. 그저 흔하디흔한 ‘서로 사랑하세요.’ , ‘착하게 사세요’라는 말들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지루한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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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글은 그런 지루한 메시지를 지루하지 않게 전달하는 글이다. 결국 같은 의미이지만 새롭게 다르게 전달할 때, 읽는이의 마음이 움찔해진다. 결국 공부와 단련이다. 인문학 공부라는 것도 ‘사랑하세요, 착하게 사세요’라는 자명한 메시지를 얼마나 다채로운 언어로 표현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겠나. 그것이 빛나는 사유이고, 그런 글을 읽으면 배꼽 아래 단전 부분부터 훈훈해짐을 느낀다. 그러면서 나는 아마 조금 착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글이다.
“『장자』에는 자기 분야에서 도를 섬기는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왕이나 재상 혹은 지식인이 아니라 초야에 묻힌 사람들이다. 서툰 소잡이는 한 달에 한 번 칼을 갈고 그보다 좀더 능숙한 소잡이는 일 년에 한 번 칼날을 세운다. 그러나 진정 능숙한 소잡이는 한 번도 칼을 갈지 않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그는 소의 뼈나 근육에 칼을 대지 않는다. 그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뼈와 근육 사이의 공간을 꿰뚫는다. 그곳에 칼을 대면 힘들이지 않고도 쩍 갈라진다. 텅 빈 공간은 도에 이르는 길이다. 능숙한 소잡이가 칼날을 세우지 않듯이 공간을 보는 사람은 생각의 속임수를 알기에 분노와 두려움의 칼날을 세우지 않는다. 하이데거 역시 마음과 언어 한가운데서 텅 빈 공간을 보았다. 가운데가 텅빈 것이 사람이고 집이고 예술작품(시)이다.”
-권택영, 《생각의 속임수》,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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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간에 칼날을 찔러 넣는 소잡이는 아마도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소의 고통을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마음 상태를 기르는 것이 진짜 인문학 공부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