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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Aug 23. 2021

'텅 빈 인간'이 머무는 자리

김의경, <시디팩토리>


◉김의경, 「시디팩토리」-‘텅 빈 인간’이 머무는 자리 


1997년 IMF 이후의 한국 사회는 ‘각자도생’의 전쟁터였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성공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당시 여의도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나는 새벽 어스름이 깔려있던 이른 시각에 어학학원의 강의실이 직장인들로 꽉 들어찼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도 거기에 있던 직장인 중 한 사람이었으나 아침 잠이 많았던 나는 몇 달 다니다 새벽학원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최선을 다하는 삶’은 나와는 달랐다. 그들은 새벽 공부를 마치고 헬스나 수영으로 몸을 단련하고, 빌딩 숲에 있는 직장에 출근했다. 퇴근 후에도 업무와 관련된 ‘자기계발’로 조금의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나는 이 시기의 사람들 다시 말해 90년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자기계발을 하면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데 노력을 다한 사람들을 ‘경쟁하는 인간’으로 부른다. 이들의 경쟁 상대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멋진 말(?)들이 유행했다. 그들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일하면 어제보다 나은 삶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았고, 이 말은 어느 정도는 실현 가능 했다. 이때에는 적어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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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알다시피 1997년 비정규직이 생겨난 이래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더욱 열악해졌으며 삶은 힘들어졌고, 세상은 더욱 살벌해졌다. 미래를 꿈꾸기는커녕 먹고살기에도 돈과 시간이 부족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라는 말은 어쩌면 한낱 헛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시하게 된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헛된 희망을 품지 않고,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항하지 않았다(못했다). 그냥 현실을 체념하거나 받아들였다. 삶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한 이유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럴만한 시간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일이 체제를 뒤집어 바꾸는 일보다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먹고사니즘’은 모든 그럴듯한 시대의 사상과 이념을 앞선다. 경쟁을 숙주로 삼아 작동하는 자본주의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이 ‘먹고사니즘’이라는 목에 칼을 대고, 저항할 수 있는 뿌리까지 없애버리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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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저항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이내 체념하고 자신만의 굴을 파고 들어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 모른다. 나는 이들이 세계에 대한 어떠한 ‘희망’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텅 빈 인간’이라고 명명한다. 이들은 이 시대에 등장하게 된 새로운 인류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텅 빈 인간’은 성공을 위해 노력도 하지 않으며, 더 나은 미래, 행복한 삶 따위의 말을 삶의 신조로 삼지 않는다. 타인과 관계 맺기에 의미를 두지 않으며, 혼자만의 내적 세계를 키워간다. 따라서 그들에게 직업 활동은 생활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을 마련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을 뿐이다. 일주일 생활비로 7만 원이 필요하다면 딱 그만큼의 노동만을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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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에서 이런 ‘텅 빈 인간’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는 소설가들 중에 내 눈에 돋보이는 소설가는 김의경이다. 그녀는 ‘텅 빈 인간’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는 방식이 아닌, 그 주변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듯하다. 다시 말해 ‘텅 빈 인간’이 사는 공간과 환경, 주변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 사회적 조건들을 세밀하게 파헤친다. 이번 소설 「시디팩토리」는 ‘텅 빈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 즉 ‘집’에 대한 사유다. 이 시대의 ‘텅 빈 인간’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라는 것이 김의경이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이 ‘텅 빈 인간’을 어떻게 하면 이 사회로 끄집어내는가에 맞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전에 ‘이 세계는 경쟁하지 않고 살만한 사회인가’라는 질문이 먼저 선행되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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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시디팩토리」에는 지하 셋방에 살면서 단기 알바로 근근이 살아가는 주인공 다혜가 등장한다. 그녀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는 미래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계속되는 취업 실패로 더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게 되었다. 다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단기 알바를 할 때를 제외하고 집에서만 머문다. 세상과 단절한 채 며칠씩 누워있는 다혜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지하 셋방은 그녀에게 두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타인과 경쟁하지 않아도 숨 쉬며 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며, 먹고 자는 삶이 실현되는 우주적 공간이다. 동시에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세상 밖에는 없는 자신만의 공간이다. 지하 셋방은 다혜에게 자유의 공간 그 자체이면서 그나마의 텅 빈 삶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를테면 지하 셋방은 그녀의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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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혜의 공간에 단기 알바에서 우연히 만난 하령이 며칠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다혜의 삶은 깨지기 시작한다. 공무원 시험에서 낙방을 거듭하던 하령은 급기야 큰소리치고 집을 나와 버렸고 갈 곳이 없다고 했다. 그런 하령을 다혜는 순순히 받아들인다. 하령은 식사 준비와 빨래, 청소를 도맡아 하면서 밥값을 하는데, 잠깐만 머물겠다던 그녀는 두 달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둘 사이에 다툼이 잦아지자 다혜는 하령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하령은 돌아갈 집이 없다. 집을 나오기 전 식구들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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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령은 다혜처럼 존재를 지켜낼 만한 최소한의 공간도 갖지 못한 존재이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하령이 잔인한 세상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는 의미이며, 경쟁하고 싸우고 나서 돌아와 편히 쉴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자유의 공간이 없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하령에게 존재로서의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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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자신만의 정박지를 찾지 못한 존재가 결국 당도하게 될 공간은 어디일까. 집에서 나가달라는 말을 들은 하령은 다혜에게 피자를 사다 달라고 부탁하고 다혜가 밖으로 나간 사이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다. 결국 하령이 마지막으로 간 곳은 ‘하늘나라’였다. 하령은 그렇게 자신이 있을 만한 공간을 구하지 못한 채 죽는다. 경쟁에서 빠져나온 존재들이 살만한 공간이 ‘이 세계’에는 없다는 것을 소설은 아프게 말해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이렇게 참혹하고 잔인한데도,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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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지옥’이라 부른다. 세상 천지에 누구도 지옥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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