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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Jul 14. 2021

만약에 말이지

더행의 에세이


◉ 만약에 말이지


‘만약에……’ 이런 상상은 잘 안 하지만, 2년 전 큰일(?)을 한 번 겪으면서 처음으로 만약에, 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만약에, 내게 살아서는 다 쓰지 못할 정도의 큰돈이 생긴다면 나의 삶은 달라질까?


통장 잔고를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든 살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바뀔까? 라는 상상 말이다. 아주 구체적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의 모든 삶이 디테일하게 어떻게 바뀔까를 생각해 본 것이다.


처음에는 어리벙벙할 것 같다. 가만히 있어도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오고, 세상 모든 일에 관대해지고, 아름다운 말만 하면서, 우아하게 말이지, 그 뭐냐, 아프리카 원숭이가 먹고 싼 똥에서 나온 원두를 갈아서 만든 비싸다는 커피를 사다가 마셔보는 흉내도 내고 말이지....그리고 나서는 어떨까. 


그런데 갑자기 돈이 많아졌다고 해서 내가 매일 가는 산행을 중단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벼락 부자가 된 그다음 날에도 나는 그 전날과 똑같이 새벽에 어둠을 더듬거리면서 일어나 운동복을 입고 산에 올라갈 것이다. 누군가에게 돈을 주면서, 내가 산행을 하지 않아도 한 것과 같은 운동 효과와 기분을 주는 상품(?)이 생기지 않는 이상, 아니 그런 상품이 나오더라도 나는 내 두 발로 할 수 있는 산행을 선택할 것이다.  


밥을 먹을 때도, 전과 다르지 않은 음식들을, 한정된 양 만큼만 먹을 것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갑자기 안 먹던 음식을 사 먹으러 돌아다니거나, 불로초 같은 것을 사서 먹지는 않을 것 같다. 고급 식당에 가서 낯선 음식을 먹으며 신기해서 눈알을 굴리며 감탄하는 그런 짓은 안 할 것 같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지금의 채식 위주의 소박한 식사 습관을 유지할 것이다. 달라지는 게 있다면 중국 음식 먹을 때 탕수육 시킬 것을 깐쇼새우로 주문하는 정도이지 않을까. 


또 차도 바꾸지 않을 것 같다. 굴러다니는 차에 돈을 많이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차에 별로 관심이 없다. 1억짜리든, 2억짜리든 내게 차는 그냥 차일 뿐이다. 누가 공짜로 준다고 해도 싫다. 


최신의 물건들도 사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물건을 사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하나를 사면 그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는 구식의 마인드 때문이다. 난 돈이 있어도 이미 쓰고 있는 가구를 고급으로 바꾸지 않을 것이며, 20년 된 냉장고와 에어컨도 최신품으로 교체하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을 그대로 사용할 것 같다. 새것보다는 헌 것을 아껴 쓰는 기쁨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해외여행도 안 갈 것 같다. 원래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하지 않고, 여행도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환상(?)같은 것이 없다. 책과 유투브면 충분하고 ㅋㅋㅋ, 그런데 다니는 것도 젊을 때나 좋다. 


물론 내게 영향을 많이 준 작가들이 살던 곳에는 가보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글을 썼던 러시아의 집필 공간에는 한번 가보고 싶고, 갈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해외여행은 지금도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돈이 많고, 없고의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니, 갑자기 큰돈이 생기는 것은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쉽게 알게 된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나는 지금처럼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엄청난 명예를 얻는 다거나, 유명인이 된다거나, 갑자기 베셀 작가가 된다거나(그런데 이건 좀 좋다 ㅋㅋㅋ), 갑자기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 해도 일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나의 삶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앞에 열거한 것들을 얻으려는 집착이나 노력이라는 것도 내게는 솔직히 큰 의미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ㅋ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산에 가서 얼마나 땀을 흘렸고, 기분이 상쾌했으며, 내 근육이 어제와 다르게 얼마나 단단해졌으며, 오늘 얼마나 맛있는 밥을 먹을 것이며, 목젖이 보이도록 웃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에 잠길 수 있는가, 또 이런 것들을 글로 잘 옮길 수 있는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고 또 소중하다. 


우주는 내가 얻어내고 이룰 성취와 돈과 능력, 타인이 해주는 인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상에서 얼마나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고,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감각하며 감동하는 세포를 중심으로 서서히 돌아갈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충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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