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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Jul 13. 2021

나는 나를 찌르고 싶다

천운영, <그림자 상자>

◉ 나를 찌르고 싶다     

천운영의 소설 「그림자 상자」의 주인공 ‘나’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엄마와 아빠, 언니는 늘 ‘나’를 냉담하게 대한다. ‘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가족들이 낯설게 느껴질수록 ‘나’는 자신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가족들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나’는 가족과 함께 살던 집에 혼자 남겨진다. “가족에게서는 딱 한 번 안부 전화가 왔을 뿐” 어떤 연락도 오지 않는다. 이후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 안에 틀어박혀 은둔자처럼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맹렬한 허기를 느끼고는 보이는 대로 집히는 대로 음식을 입에 쑤셔 넣는다. ‘나’의 몸집은 하루가 다르게 커졌고 살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갔다.   

   

‘나’는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두툼한 뱃살에 칼을 찔러 넣는 꿈을 자주 꾼다. 누군가의 칼에 찔리는 꿈은 ‘나’를 기쁘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찔리고 잘리는 고통의 느낌을 상상하며 “꿈속에 더 오래 머물고 싶다”고 생각한다. 꿈에서 깨면 ‘나’는 두툼한 자신의 뱃살을 보며 다시 칼을 상상한다. “칼은 피하지방 사이를 뚫고 들어와 살의 결을 가르고 내장을 찌른다. 그러면 또다시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그녀가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무서운 식욕을 억제할 수가 없는 이유가 된다.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고통 섞인 기쁨만이 ‘나’의 허기를 채울 수 있다. “몸에 칼이 꽂히는 상상을 하는 순간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사라진다.” 그러니까 ‘나’에게 칼은 “면죄부다.” ‘나’는 살고 싶다.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와 증오없이 살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칼에 찔려야만”한다. 그렇다고 ‘나’가 직접 자신의 몸에 칼을 찔러넣을 수는 없다. ‘나’는 그럴 만큼의 담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배에 칼을 찔러넣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칼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정화되는 그 순간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대신 ‘나’의 몸에 죽지 않을 만큼만 칼질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TV를 보다 우연히 알게 된 한 남자에게 연락한다. 그는 어린 시절 가족을 잃어버렸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가족을 찾고 있다. 그는 남자에게 ‘죽지 않을 만큼만 자신의 몸에 칼을 찔러 넣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약속한다. ‘나’는 남자가 자신을 찌르는 순간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준다.  

    

소설에서 ‘나’의 ‘허기’는 폭식으로, 자신에 대한 가학으로 채워진다. 이 굶주린 욕망의 화살은 그것의 원인 제공자인 자신을 버린 가족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로 와서 꽂힌다. 이것이 ‘나’가 자신을 파멸시켜야 비로소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이렇게 소설은 손에 칼을 쥐고 그것을 자신을 향해 휘두르는 한 인간을 지켜본다. 당연하게도 그 결과는 한 인간의 ‘파멸’뿐이다. 이 소설에서 한 인간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의외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파멸이 이렇게 쉬운건가, 라는 허탈한 마음이 들게도 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언뜻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손에 칼을 쥐고 걸어가는 길과 같다고. 누구에게나 손에 칼이 있다고. 그 칼끝이 타인에게로 향하느냐, 나에게로 향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리고 생각보다 그 칼을 휘두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각자의 방식대로 칼을 뽑아 써보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가 새기고 싶은 말은 칼을 능수능란하게 잘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는 아름다움’, 다시말해 칼은 칼집에서 뽑혀 나오기 전, 휘두르기 전이 가장 순하고, 그래서 무섭고, 또 ‘아름답다’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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